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0년
샤이닝 (1980), 스탠리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샤이닝>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최고로 꼽는 영화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장르적인 장치가 견고하게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서스펜스를 풀어가고 그 공포 속에 함의를 담아냈다는 점에서<샤이닝>은 걸작으로 불리 울만 하다. 이미 만들어진지 20여년이 되었다는 점에서 장르적 컨벤션, 혹은 장르적 장치들의 사용에 있어서 평하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잘 짜여진 공포장르 영화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우리는 공포의 무대를 소개받는다. 오프닝에서 보이는 ‘섬’과 같이 이곳은 한적하고 외딴, 겨울에는 나오지 못하는 ‘폐쇄된’ 공간이다. 이 폐쇄된 공간에서 공포의 기본적인 폐쇄공포를 획득해낸다. 또한 이 공간은 예전에 ‘살인’이 자행된 공간일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미쳐서 나가는 곳이다. 이 장소에 대한 복선을 통하여 우리는 이 공간에서 무엇인가 벌어질 것이라는 서스펜스를 느끼게 된다. 또한 ‘샤이닝’으로 명명되는 아이의 이중인격을 통해서 아이가 정상이 아님을 맥거핀으로써 사용하고 있다. 영화는 이렇듯 잘 짜여진 장치들을 통해서 공포를 다루지만, 이 ‘공포’의 감정은 비단 이들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버룩(Overlook)호텔, 개척의 역사? No! 폭력의 역사!
미국의 역사는 ‘개척’의 역사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만, 특히나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이래로 ‘인디언’이라고 명명되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과의 대립은 그 ‘개척’의 역사의 큰 축을 차지한다. 미국의 독립 이후 영토를 늘려가려는 미국인들에게 인디언들은 바로 그 개척의 대상이었고, 많은 수의 인디언들이 강제로 이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많은 인디언들의 피를 흘리게 된다.
영화의 주공간인 오버룩(Overlook) 호텔은 사전적으로 크게 ‘간과하다’, ‘못 본 체하다’, ‘(건물 등이)바라보다’, ‘고려대상으로 삼지 않다. 라는 뜻을 지닌다. 어떠한 사실을 간과하고, 혹은 모른 체하고, 고려대상으로 삼지 않은 공간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고, 호텔로 향하는 잭을 뒤쫓는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는’ 형식으로 관객들에게 제시된다. 영화는 ‘누가’, ‘무엇을’ 간과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누가’는 바로 오버룩 호텔로 대표되는 ‘미국’이다. 오버룩 호텔의 색은 Red, Blue, White로 구성되는데, 미국의 성조기를 대표하는 이 색들은 특히나 호텔의 사장이 소개되는 컷에서는 금발의 백인, 빨간 넥타이와 파란수트, 그리고 앞에 놓여있는 성조기까지 동원하여 호텔의 주인이 바로 ‘미국’ 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엇을’ 간과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호텔이 인디언 묘지 위에 세워진 것을 설명하는 사장의 말로써 드러난다. 오버룩 호텔은 바로 ‘인디언’의 시체 위에 세워진 ‘미국’의 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성조기의 색과 대비되는 녹색과 황토색, 체크무늬등과 같은 인디언적인 이미지들의 상징들은 이러한 면면에서 끊임없이 영화 내에서 이미지 적으로 대립한다. 결국 영화 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살인과 폭력은 입주자들의 자체적인 광증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공간의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잭의 광증, 1921년과 현재. 역사의 반복
영화 내에서 ‘잭’은 미국인이다. 그리고 전형적인 미국인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호텔의 전 관리인은 ‘찰스 그래디’라는 영국인으로 보이는, 그리고 영국 이름의 백인이다. 미국의 역사가 영국 청교도들의 신대륙 개척정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살인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자행하는 같은 ‘미국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잭이 찰스의 뒤를 이어 관리인이 된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개척정신의 계승뿐만 아니라 폭력의 계승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의 말미에서 잭이 1921년 독립기념일 파티에 있는 것은 해석이 가능하다. ‘잭’은 비단 현실의 사람만이 아니다. 1921년부터 그는 쭉 존재해왔고, 다른 직업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통해서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미국인이라는 명목 하에 폭력을 자행하며 살아온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전지적 존재가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는 쇼트들이 많이 사용되는 이유도 이것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미로를 헤매는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는 잭의 시선을 전지적인 시점의 쇼트로 찍음으로써 감독은 ‘잭’이라는 캐릭터를 일종의 미국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신화화하기에 이른다.
자아와 무의식, 샤이닝
영화의 호러적인 측면을 이끌어 가는 것은 잭과 아들 대니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대니는 ‘토니’로 소개되는 제 2의 자아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그것은 거울을 통한 분열된 자아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대니가 호텔에서 피처럼 보이는 붉은 럼주(Red rum)가 쏟아져 내려오는 ‘샤이닝’마저 보게 되면서 관객들은 일종의 맥거핀으로써 대니로부터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서 대니의 무의식인 ‘토니’가 오히려 살인을 예고하고 좋은 측면으로 작용한다면, 점차 분열해가는 ‘잭’의 자아는 나쁜 측면으로 작용한다. 오프닝부터 제시되는 화면의 z축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들은 영화 전반적으로 끊임없이 인물들의 뒤를 쫓으며 마치 미로와 같은 의식의 흐름 속의 무의식으로 향하는 듯한 이미지를 줄 뿐만 아니라, 큐비즘 그림들을 통해서 또한 무의식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큐비즘이라는 사조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적으로 분석하여 대상을 가장 진실 되게 묘사하려고 하는 시도에서 나왔듯이, 이러한 장치들은 영화 내적으로 계속해서 관객들이 무의식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이와 관련하여 칼 융의 무의식 이론 중<그림자 원형>에 대한 한 부분을 소개하겠다.
융은 인간의 정신을 의식과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중략)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이러한 무의식 속의 원형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 안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가 공유하는 원형들이 있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 원형은 그림자(the shadow), 아니마/아니머스(anima/animus), 현자(the wise old man), 대모(the Great Mother), 자기 원형(the Self) 등이다.(중략) 이들 중 가장 접근하기 쉽고 가장 경험하기 쉬운 것이 그림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은 개인 무의식의 내용에서 대부분 이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전체적인 자아-개성을 위협하는 도덕적인 문제이다, (중략)그림자는 의식의 자아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 안의 다른 모습이다. 의식의 자아는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들을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고 억눌러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한다. 이렇게 억눌려진 요소들은 무의식 속에 뭉쳐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그림자 원형을 형성하게 된다. 그림자라고 알려진 원형은 어떤 것의 어둡고 표현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거나 거부당한 측면을 말한다. 종종 그것은 우리 내부 세계의 억압된 괴물의 본거지이다. 그림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우리가 스스로에게 조차도 인정 할 수 없는 모든 검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부정하고 근절하려고 한 성질들은 여전히 내부에 숨어 있으며 무의식의 그림자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Vogler 71)(중략) 그림자는 숨어 있거나 어떤 이유로 우리가 거부한 긍정적 성질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Vogler 71).
- ‘그림자 원형과 집단 무의식’, 이부영.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반려자, 그림자. 한길사, 1999
앞서 이야기 했듯 잭에게 있어 그림자는 내부의 괴물과 같아서 의식 세계로 튀어 나왔을 때 그는 엄청난 폭력성과 잔인함을 보인다. 잭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파괴성은 그의 그림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대니의 그림자인 토니는 긍정적 측면을 보여준다. 대니의 내면세계의 친구인 토니는 이렇게 숨겨진 대니 안의 긍정적 에너지라고 볼 수 있다.
폭력의 대상 - 인디언, 흑인, 그리고 여자.
영화 내적으로 ‘잭’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폭력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샤이닝’ 능력을 가지고 있는 흑인 요리사의 죽음을 야기하게 된다. 흑인 요리사의 죽음은 이 영화가 미국의 폭력을 냉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상된 점이지만, 사실상 ‘인디언’에 대한 폭력은 언뜻 보면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이 금발에 전형적인 백인들이였다면<샤이닝>의 여주인공은 흑발에, 마치 인디언과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호텔내의 인디언 장식들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점차 인디언을 상징하는 색깔의 의상을 입는다는 점에서 ‘인디언’을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 대니를 죽이려고 쫓아가는 후반부의 씬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통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의 세대를 상징한다고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살부(殺父) 모티프, 즉 오이디푸스적인 서사는 세대의 교체를 다루는 서사에 매번 등장해 왔다.<샤이닝>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들을 쫓으려는 아버지가 결국 아들을 죽이지 못하고 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폭력의 고리는 끊기고 세대가 교체됨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스탠리 큐브릭이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인식했기 보다는 미국이 폭력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다음 세대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영화 내에서 폭력의 대상으로 놓여 있는 것은 ‘여자’다. 영화의 사건들은 남자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호텔에서 묵는 결정도 ‘잭’의 독단으로 결정될 뿐 아내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뿐이다. 초반부의 사무실 시퀀스에서의 대화는 그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평범한 사람들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사장의 경고를 잭은 아내가 ‘좋아할 것이라고’ 자기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 결정 이후에도 작게나마 불평을 하는 것은 같은 남성인 아들 대니뿐이다. 또한 전임 관리인인 ‘찰스 그래디’에게 살해당한 대상이 두 쌍둥이 여자아이들이었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남성의 상징인 도끼를 들고 아내를 위협하는 모습은 그 폭력의 대상이 ‘여성’이고,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인디언과 더불어 현저히 낮은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잘 짜여진 공포영화의 틀을 쓰고 있지만<샤이닝>은 분명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을 다룬다. 미국인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개척정신’이라는 것의 실재가 사실은 붉은 럼주(Redrum)로 대변되는 살인(Murder)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인과 폭력은 계속해서 유령처럼 떠돌며 반복되고 있다. 1980년도에 끊겼으면 좋았을 것을 오늘날에고 미국의 공포와 폭력은 여전하다. 언제쯤 도끼를 든 살인마 ‘잭’은 안식에 들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