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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CAT Sep 28. 2018

영화 읽기 : 사울의 아들

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6년


홀로코스트를 보는 시선 - ‘구원’의 이야기


먼저, <사울의 아들>의 내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귀향>이 개봉하여 큰 흥행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관한 이야기처럼 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만들어져왔다. 왜냐하면 나치 대학살의 그 참혹한 사건을 다루는 시선이 자칫 조금이라도 경솔한 순간 영화는 폭력으로 변질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실화를 다루는 영화가 모두 그러하겠지만 특히 홀로코스트에서는 더욱 그렇다. 또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비중에 대해서도 커다란 고심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을 주관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이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를 전제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떤 시선으로, 어떤 위치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심도를 사용한 시점쇼트


영화의 첫 장면이 영화 전체를 볼수 있게 만드는 설정쇼트이자 세계관이라고 하면, 영화 <사울의 아들>의 첫장면은 포커스가 나간, Out-of-focus(이하 아웃포커스)상태로 시작한다. 그리고 사울이 뛰어서 프레임 인 되어 나타나면 사울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사울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사울의 아들>은 바로 이 초점이동을 이동하여 인물의 시선이동을 설명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사울을 쫓아간다. 사울 이외의 모든 객체들은 모두 아웃포커스 되어 있으며, 심지어 나치가 ‘토막’이라 명명하는 시체들마저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형체로만 보이게 된다. 사울은 주변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왠만해서는 시선을 두지 않는다. 감독은 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일까?


1차적으로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갖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객 스스로의 이미지를 최소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일종의 시체를 만들고 치우는, 마치 시체공장처럼 그려지는 수용소 안에서 잔인하게 도살되는 이미지를 영화 내내 보여준다면 아마 관객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들은 이미 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진바 있다. 감독은 이러한 익숙한 이미지를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홀로코스트의 참혹함과 공포를 보여준다. 우리는 무서운 영화나 무서운 것들을 볼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눈을 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각이 제한될 때 우리의 오감은 그 다음으로 청각으로 향한다. 바로 <사울의 아들>은 이 지점으로 향한다. 시각이 제한된 영화. 하지만 그로 인해 영화는 사울에 대한 집중도와 사울의 귓가에 들리는 홀로코스트의 참혹함을 얻는다. 초반부 사울이 가스실 앞에서 벽 너머로 듣는 사람들의 절규와 죽어가는 소리는 관객들이 그 참혹한 이미지를 보고 감독으로부터 제시받는 것보다 더 큰 공포와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2차적으로, 이 아웃포커스 장면들은 바로 사울의 P.O.V라는 점에서 사울이 주변을 바라보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가?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기에도 너무나 힘든 사울의 공포심을 보여준다. 사울은 공포스러운 현실에 스스로 눈을 가린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 아웃포커스는 사울의 죄책감도 표현한다. 같은 유대인들을 죽이는 과정 속에 동참한 사울은 다른 이들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 마치 스스로 눈을 감고 저들은 ‘토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초점나간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암울한 현실 인식과 아우슈비츠에 대한 현실을 볼 수 있다. 영화 안에서 몇몇 인물들은 계속해서 아우슈비츠에 대한 문서와 ‘사진’을 남기려고 한다. 이는 이 끔찍한 현실이 세계로 알려져야 한다는 현실인식이지만 영화 내내 단 한쇼트도 수용소의 전경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몰래 숨겨놓은 카메라를 꺼내 수용소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에도 연기가 자욱해지며 수용소에 대한 정보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베일에 둘러싸인 것처럼 학살 당시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는 점과 영화 내적으로는 그들이 나아가야할 미래가 뿌옇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도 언제 토막들처럼 도살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시점쇼트와 주관적 시점쇼트,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조합


카메라는 사울을 집요하게 따라가지만, 사울 이외의 사람들도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P.O.V(시점쇼트) 인데, 보통 영화의 시점쇼트가 시점의 주체(보는 사람)+시점의 객체(보는 것)로 이루어 진다면 <사울의 아들>은 이를 초점이동을 통해 하나의 쇼트로 연결한다. 왜일까? 이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영화의 화면비율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감독이 사용하는 모든 장치는 바로 감독이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보고 표현하고자 하는 선택일텐데, 화면비율에 관한 선택에서도 감독의 시선이 드러난다. 1.33:1, 일반 관객들에게는 4:3 화면비율이라고 더 잘 알려진 이 화면비율을 사용한 이유,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4:3 화면은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다. 인물과 배경의 비율을 놓고 볼 때 인물을 크게 잡으면 배경의 비율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배경보다는 인물에 중심을 두고 관객들이 따라가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감독이 시각적으로 홀로코스트를 표현하지 않기 위해, 즉 눈을 가린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시각적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는 VR영상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첨단기술과는 정반대의 효과다. 관객이 선택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보다 감독이 주어주는 이미지만을 집중해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사울이라는 인물만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6:9가 둘 이상의 인물을 표현하기 적절한 것처럼, 4:3은 한명의 인물을 표현할 때 최적의 화면비율이다. 여기에 영화의 모든 시선이 거의 사울의 1인칭으로 이루어지기 떄문에 이와 더불어 더욱그렇다. 세 번째로,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바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수용소라는 점이다. 답답한 4:3의 화면비율은 마치 아우슈비츠라는 수용소처럼 프레임 안에 인물들을 답답하게 가둔다. 관객들이 익숙치 않은 화면비율을 보며 답답해하는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좁은 방과 가스실 안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고통과 연결된다. 영화는 실제의 수용소의 경관들을 시원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4:3이라는 프레임이 수용소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표현하려는 감독의 태도다. 감독은 이 영화를 주관적인 시선의 극영화로 찍으려는 것보다 조금더 인물을 중심에 둔 객관적인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지닌 영화로 찍으려고 한다. 방송의 화면 비율이 상당기간 4:3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영화보다는 방송에서 많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감독은 이 화면 비율을 사용한다. 이는 영화가 갖는 재현력을 높인다. 이 영화가 16:9. 혹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인 2.35:1로 촬영되었다면 현실을 보는듯한 느낌보다는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느낌일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앞서 얘기한 초점이동을 이용한 시점쇼트는 바로 좀더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원하는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극영화의 경우 컷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컷을 많이 사용할 경우 컷과 컷 사이의 진실성이 의심받기 때문에, 최대한 의도되지 않은 느낌을 살리고자 많은 컷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 이 컷과 컷사이의 간격을 좁힘으로서 관객들은 내가 보고있는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촬영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초점이동을 통한 시점의 이동을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본래 두 개로 나뉘어야 할 쇼트들은 연결하여 현실감을 강화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모두 원테이크로 찍혀진 것은 아니다. 영화의 객관적 P.O.V가 초점이동으로 이루어 진다면 주관적인 P.O.V는 기존의 영화관습대로 이루어진다. 시선과 반응 쇼트로 이루어진 첫 번째 주관적인 시점쇼트는 바로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발견하고 의사가 다시 그 아이의 숨을 끊는 순간이다. 쇼트를 나눈 것은 물론 이것이 주관적인 시점쇼트인 이유는 바로 인물간의 거리감이 과징되어 사울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읽히는 지점에 있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의 지점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의미없이 생존해 오던 사울은 이 특별한 순간 이후에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아들의 장례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써의 변화 지점이다. 이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감독은 <사울의 아들>을 사울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자 사울이라는 주인공이 아들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영화로 만들어낸다. 이 주관적 쇼트를 기점으로 영화는 종종 컷을 사용한다. 이어서 커트가 이루어 지는 부분을 살펴보면 아이의 시신을 안고 의사에게 향한 사울이 의사를 보는 지점이다. 이 장면은 사울의 O.S쇼트와 반응쇼트로 구성된다. 의사와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일방적인 사울의 P.O.V가 아닌 O.S쇼트를 사용한 이유가 있을진데, 이는 사울이 타인과 관계를 맺지않는 인물이었다면 이 O.S쇼트 이후 사울은 의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쇼트를 통해 의사는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차별화되고 사울의 아들의 시체를 숨겨주고 도와주는 조력자로 변화한다. 단지 쇼트의 변화를 통해 인물간의 관계를 설정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35mm필름의 사용


영화는 최근 거의 사용하지 않는 35mm필름으로 촬영되었고,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큐멘터리적인 시선, 즉 그 시대의 기록물처럼 보이는 시대감을 갖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가 HD로 촬영되었을 경우 물론 후반작업을 통해 그와 비슷한 질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해내긴 어렵다. 또한 영화에서의 연기나 혹은 장면구성들이 반복하기 어려운 장면들인 것도 필름을 선택한 이유로 보여진다. 만약 디지털 촬영으로 진행되었다면 상대적으로 얕은 심도와 끊임없는 초점이동, 핸드헬드 촬영, 그리고 주변의 제반 프로덕션디자인등을 ‘반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여러차례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독은 시대의 질감을 얻기 위해 35mm를 선택했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촬영운용을 위해 ‘극약처방’을 한 방법으로도 읽힌다.


랍비를 찾는 사울, 신을 찾는 사울


사울은 아들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랍비를 찾는다. 이는 사울이 유대인이기도 하지만 이 시체공장에서 사울이 할 수 있는 아이를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랍비는 기도는 해줄 수 있지만 장례를 치러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이미 이 수용소 안에 종교의 개념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미 종교, 즉 신이 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참혹한 현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랍비는 이미 장례를 집전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같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소각하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걸리면 안되기 때문에’ 장례를 집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랍비 자신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감히 장례를 집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례는 일종의 제사이고 제사는 유대교에서 예배와 미사같은 의식인데, 오늘날 사제와 같은 랍비라는 존재는 이미 아우슈비츠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울은 다른 수용소에서 오는 랍비를 찾아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헤맨다. 자신이 랍비라 말하는 이를 의심 없이 믿고,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사울의 모습은 신을 향한 믿음의 방식과 일치한다. 사울은 수용소 안에서 사라졌던 계명,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홀로 실천한다.


사울이라는 이름, 구원의 길


사울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두 번 등장한다. 먼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과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울이다. 영화에서는 이 두명의 사울을 모두 차용한다. 먼저 구약성서의 사울은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전쟁터에 나가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구약의 사울은 <사울의 아들>의 원안이 될 수 있다. <사울의 아들>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전쟁터와 같은 수용소에서 아들을 잃고 자신마저 목숨을 잃는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사울은 예수를 부정하고 배척하다가 예수를 만나게 된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는 영화 초반부의 사울이 신의 뜻과 반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아이를 만나게 된 이후 랍비로 상징되는 신을 찾아 헤매는 변화의 지점에서 영화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두 사울의 관점에서 영화를 본다면 아이는 바로 ‘야훼’이자 ‘예수’, 바로 ‘신’이다. 영화 안에서 사울은 두 번이나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아이는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맞서 사울은 본처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로 답한다. 이 말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아이 장례를 치러야 하는 사울의 내면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간음하는 것을 십계명에 의해 죄악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정말 맹목적으로 아이의 장례를 위해 노력한다. 그의 노력은 다른 이들에게는 ‘산자를 버리고 죽은자를 위한 길’로 치부된다. 하지만 사울은 우린 이미 예전에 죽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당당함을 갖는다. 왜 그는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미 죽은자이자 더럽혀진 인물, 그리고 타락한 죄인인 사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발견한 아이의 장례를 성공적으로 치루는 것이다. 그가 아이의 장례를 치루려 하는 것은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자 아우슈비츠라는 지옥도에서 신을 찾아 헤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아이와 예수


앞서 언급했듯 죽은 아이는 신을 상징한다. 이는 사울에게 아이가 없다고 연거푸 말하는 주위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성경에서 ‘예수’는 바로 육신의 아버지가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어진 것이지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잉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은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요셉의 길을 자처한다. 자신이 아이의 육신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스스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아이의 장례를 치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진짜 그 아이의 아버지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죽었다.’라고 생각되는 아우슈비츠 내의 참혹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사울만이 아이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영화 내부에 객관적 Full shot. 즉 상황과 전체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쇼트가 없다는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쇼트는 사울 중심의 1인칭 쇼트고, 사울의 시선에서의 아우슈비츠다. 감독은 3인칭 쇼트를 배제함으로써 이 영화에서 ‘아이의 죽음’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 한다. 신약의 사울은 예수를 보자 자신의 지난 과거를 뉘우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부활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을 비교해 볼 때, 사울이 치루려고 하는 ‘장례’는 무엇을 위한 초석인 것인가? 앞서 이야기 했듯 장례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미사다. 미사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예식으로 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일종의 제의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울이 치르고자 하는 장례가 비단 아이의 죽음을 기리는 의식이 아니라 바로 아이의 부활, 즉 예수의 부활을 목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아이가 부활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상징들 뿐만이 아니다. 아이는 모두가 죽어나가는 가스실에서도 죽다가 살아난, 즉 부활한 아이다. 그냥 자신의 아이를 찾는 것이었다면 사울은 시체들을 정리하다가 아이를 발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사울이 어떻게 아이와 헤어졌고 어떻게 아이를 알아보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주관적 시점쇼트로 아이를 바라봤을 때 감독이 의도한 것은 1차적으로 아이의 외관을 관객들이 눈에 익히게 함이었고, 2차적으로는 바로 죽은 나의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다 살아난, 즉 부활한 어떤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신은 나찌의 손에 다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이 부활의 순간을 목격한 사울은 다시금 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고, 구원을얻기 위해 아이의 장례를 치르려고 한다.


세례와 구원


<사울의 아들>에는 총 두 번 강물에 빠지는 사울의 모습이 나온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모두 랍비와 함께 빠진다는 점인데, 첫 번째 장면은 중반부 아이의 장례를 치러달라고 찾아간 랍비가 사울을 피해 물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단순하게 보게 된다면 이해가 되기 어렵지만, 앞에서 읽어 왔던 것들을 종합해 보면 신의 존재와 그 부활을 믿는 사울이 나타났고, 랍비 스스로 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시나 비슷한 장면을 영화 후반부에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아이의 시체를 데리고 아우슈비츠를 탈출하여 장례를 치르려는 순간 랍비라고 믿었던 이가 장례 집전은 못하고 아이를 둔채로 사울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것이다. 랍비가 사울을 끌어안고 강을 건너는 이 장면은 사울이 드디어 물에서 세례를 받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사기꾼이라고 이야기하던 랍비는 사울의 믿음에 보답하여 장례는 집전할 수 없었지만 사울에게 물로 세례를 주고 그의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무도 랍비라고 믿지 않았던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세례자였고 예언자이자 랍비였던 셈이다. 이 사울의 믿음으로 인해 사울은 세례를 받고 수용소에서의 죄악을 씻어낸다. 아이의 시체를 뒤로하고 강을 건넌 사울이 비로소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강물에서의 세례를 통해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오두막에 도착해서 쉬는 장면들은 놀랍도록 가스실 내부와 닮아있다. 가장 유사한 것은 물에 젖긴 했지만 사람들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내내 보아왔던 가스실 장면들에 오버랩되며 이 인물들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가, 영화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울의 주관적 시점쇼트는 처음 아이를 발견했을때와 마찬가지로 영화 후반부 살아난 아이를 보게 되는 시점쇼트로 반복된다. 문틈 사이로 보이던 아이의 죽음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생환으로 변화한다. 살아온 아이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볼 때, 이 쇼트는 사울의 객관적 시점쇼트가 아니라 주관적 시점쇼트로 보인다. 사울의 주관적 시점에서, 사울은 다시 살아난 아이의 존재를 마주한다. 영화 내내 한번도 웃음을 지은적 없는 사울은 살아난 아이를 보자 비로소 환하게 웃는다. 사울의 웃음은 죽음 직전 다른 아이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본 환상이라고 하기엔 위험한 부분들이 있다. 물론 머리색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이다. 이는 유대교는 물론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교리들과 일치한다. 이들 종교에서 말하는 ‘영생’의 삶은 육신의 삶이 아니라 영혼의 삶이다. 몸은 죽었지만 아이이 영혼은 부활한 것이다. 영화 내부의 시간은 정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 성경에 따르면 3일로 추정된다. 3일동안 아이의 시신은 다른 시신과 다르게 소각되지 않고 보관된다. 그리고 3일 후, 육신의 죽음을 딛고 부활한 아이가 예수의 모습으로 사울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이 주관적 시점쇼트 이후에 두가지 방향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쇼트 이후 카메라가 비로소 사울을 벗어나 아이를 따라 가기 때문이다. 아이를 따라 움직이는 마지막 쇼트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린 먼저, 사울의 시점샷에서 아이의 시점샷으로의 변화가 이루어 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를 따라가는 시선의 촬영방식이 사울을 따라가는 시선의 표현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면을 놓고 볼 때, 마지막 쇼트를 따라가는 것은 일종의 사울 영혼의 P.O.V 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은 아이의 부활, 즉 신의 부활을 보고나서 스스로도 육신의 틀을 벗고 영혼의 부활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는 강물을 통한 육신의 죄를 씻는 세례장면과 같이 볼 때 충분히 설명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사울은 아이로 상징되는 신을 마주하고 난 이후 이미 자유로운 영혼 상태가 되어 아이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점의 전환이 아니라 여전히 사울의 시점쇼트다. 사울은 자신이 믿고 따랐던 대로 영혼의 부활을 얻어서 ‘신’의 뒤를 따라서 달려간다. 영화 내내 주변을 둘러볼수도 없는 절망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들을 통해 구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울의 아들>은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믿음을 시험당하게 되고, 마침내 믿음을 잃지 않은 한 사내가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는 신화적 이야기다. 구약의 사울은 믿음을 잃고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신약의 사울은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어느 이야기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참혹함 속에서도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고군분투한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신을 찾아 헤맸던 한 연약한 인간의 이야기. 감독은 ‘사울’이라는 중의적인 인물을 통해 두가지 방향성을 모두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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