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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15. 2018

옷을 잘못 입고 나왔다

입을까 말까 할 때는 입지 말자

어릴 땐 패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김희선 토마토 머리띠, H.O.T. 오빠들이 캔디를 부를 때 착용했던 벙어리 장갑... 유행하는 아이템이라면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무조건 하나쯤은 소유해야 직성이 풀렸다. 학창 시절 대유행이었던 리바이스 501 같은 건 내 수준에서 상당히 고가였고 심지어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간신히 하나를 사서 소풍 갈 때도, 학원이나 독서실에 갈 때도 주야장천 입었다. 내 선에서 구할 수 없는 건 친구한테 빌려 입기도 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열광하던 얼짱들의 패션


대학생이 되어 교복으로부터 해방되자, 본격적으로 몸치장에 힘쓰기 시작했다. 염색도 해보고 파마도 해보고, 미니스커트부터 스키니진까지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옷들을 코디했다. 당시 내겐 나름의 원칙 같은 것이 있었는데, '어제 입은 옷은 오늘 입지 않는다'였다.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예외가 포함되어 있다. 만약 전공과목이 월요일과 수요일에 있다면, 그 월요일과 수요일에도 중복된 옷은 입지 않는 것이다. 그 수업에 온 사람이 헹여나 '쟤는 또 저걸 입고 왔네, 옷이 저것뿐인가?'라는 오해를 할까봐서였다. 또, 어제 청순한 원피스를 입었다면 오늘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매칭함으로써 스포티한 매력도 뽐내야 했다. 나는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도 소화 가능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자 나의 착장은 조금씩 실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로 책상에 앉아 원고를 보고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일이기에 거추장스러운 블라우스보다는 편안한 티셔츠가 나았다. 정장을 입어야 하는 회사는 아니지만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에는 단정하게 갖춰 입을 필요도 있었다. 어차피 매일 보는 회사 동료들에게 굳이 매력발산을 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옷들을 입었다. 결혼식과 장례식장 갈 일이 많아지며 검은 원피스도 구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스타일이 한 지점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살'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고 더 이상 할 필요 없는 다이어트와 더불어 잦은 야식 섭취로 엄청나게 살이 불어났다. 스타일은 개뿔, 그냥 맞는 옷 중에서 그나마 날씬해 보이는 옷이 최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근래 나의 패션은 군살을 가려주는 하늘하늘 롱 원피스가 주를 이루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다행히 내가 한껏 꾸몄다고 생각했는지 종종 "오늘 저녁에 약속 있나 봐?" 하며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예쁘고 편하고 뱃살도 가려주고!


이렇게 패션에 관심이 시들해지고, 옷이란 어차피 내 자아를 덮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마인드로 지내기 시작했다. 여름엔 원피스를 입고, 가을엔 그 위에 가디건을 입고, 겨울엔 그 위에 패딩을 입으면 되는 것이지, 암.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간혹 시련이 찾아온다. 늦잠을 잔 어느 아침, 허둥대며 쌓여 있는 옷 무덤을 뒤졌다. 간절기라서 날마다 온도차가 극명한지라 옷의 디자인이 아닌 보온성을 신경 써야 했다. 너무 껴입으면 지하철에서 덥고, 너무 얇으면 퇴근길에 덜덜 떨어야 한다. 바쁜 와중에 마땅한 옷은 보이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마침, 어제 옷장을 정리하다가 나온, 작년에 사놓고 아직 한 번도 입고 나간 적 없는 기모 맨투맨이 눈에 띄었다. 맨투맨이지만 셔츠 같은 것이 아래에 길게 붙어 있어 원피스로 입을 수 있는 길이였다. "이거다!" 하며 서둘러 몸을 쑤셔 넣었다. 거울을 보니... 음, 너무 스포티한가? 좀 뚱뚱해 보이나? 갈아입어야 하나? 레깅스를 신어야 하나 아니면 스타킹을 신어야 하나? 구두인가 아니면 운동화인가? 이상하게 코디가 애매한 느낌이었다. 우물쭈물 거울 앞에서 망설여졌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일단 그냥 맨다리에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

문제의 옷은 대략 이런 스타일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옷이 신경 쓰였다. 내 몸을 비추는 거라면 거울, 유리창 할 것 없이 계속해서 의식하며 매무새를 고쳤다. 옷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건지, 내가 오늘 코디를 잘못한 건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이 쪄 보이는 것도 같았고, 언뜻 임부복 같기도 했고, 사무실에서 입기엔 너무 지나치게 편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집에서 나왔으니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언짢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으며, 사무실에서 아무도 내게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자신감이 떨어지고 위축된 상태로 찌그러져 있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 이 망할 놈의 옷 때문이었다. 내가 왜 작년에 산 옷을 한 번도 안 입고 나갔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하, 그냥 갈아입을걸!


그제야 나는 확신했다. 어딘가 께름칙할 땐 망설이지 말고 그냥 갈아입어야 한다. 조금 지각하더라도 제대로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거지 같은 기분으로 온종일 버텨야 하고, 마침내 나를 충동적 소비의 길로 안내한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점심시간에 사무실을 뛰쳐나와 새로 원피스를 사 입었기 때문이다, 키득키득) 그저 따뜻하고 편하면 그만인 옷 하나 때문에 하루를 망치는 아주 귀중하고 비싼 경험을 해버렸다. 아무리 실용성이 중요하다 해도 어느 정도 선은 지켜주어야 내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여러분,
입을까 말까 할 땐 그냥 입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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