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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16. 2018

캐모마일 티, 우아할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 작은 실험들로 이루어지는 내 인생

여름이 점점 기운을 잃고,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불어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되면 사람들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제 가을인가?"

"에이, 벌써?"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가을, 맞아. 오늘부터 가을이야."

"엥?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콧물 나잖아. 훌쩍."


그렇다. 나는 만성 비염 환자다. 허기를 알려주는 배꼽시계가 있듯, 나에겐 가을을 알려주는 콧물시계가 장착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재채기를 연속으로 일곱 차례 정도 거하게 하는 일종의 세레머니가 진행되고, 밤에는 옆에 누운 신랑이 자다 말고 "울어? 우는 거야?" 하고 묻는 계절. 그리고 나는 실제로 울고 있다. 그렇다, 가을이다.


콧물 타파를 위해 차가워진 공기를 데우면 따뜻하긴 하지만 금세 건조해진다. 아무리 대용량 가습기를 빵빵하게 틀어도 이튿날이 되면 코 안이 바싹 말라 있고, 세수를 하며 코를 풀다 보면 말라비틀어진 코딱지가 떨어져 나오며 콧구멍 안의 점막도 같이 떨어진다. 어김없이 세숫물이 빨개진다. 아, 죽겠다.


"그러면,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물을 좀 마셔보는 게 어때요?"


출근 전, 사무실보다 먼저 출근도장을 찍는 단골 카페 언니가 아이스 라떼를 건네며 말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라떼를 고집하는 내 성향을 잘 아는지라, 집에서라도 따뜻한 물을 마셔보라는 것이다. 차가운 음료는 목이나 코는 물론 위장에도 좋지 않다고 다정한 잔소리를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실 나는 따뜻하든 차갑든 물이라는 것 자체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 짭짤한 반찬이 있으면 중화를 위해 몇 모금 마시는 편이고, 평소에는 커피나 유제품을 늘 가까이에 두고 마시는지라 물을 마실 짬이 없다. 몸에 좋은 건 알지만, 물은 맛도 없고,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하루에 물 2리터씩 마시는 프로젝트를 할 때에도, 맹물은 잘 먹히지 않아서 꼭 티백이나 건조과일을 우려내야만 했다. 심지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아메리카노도 잘 마시지 않고, 꼭 우유에 탄 라떼나 밀크티를 고집한다. 이쯤 되면 물과는 영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뒤 어느 쌀쌀한 저녁, 잠들기 전에 문득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건조하고 갈라진 목을 촉촉하게 적셔줄 뿐만 아니라,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는 그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예쁜 찻잔을 앞에 두고 책을 한 권 읽으면 어떨까. 캬! 당장 수납장에 처박혀 있던 커피포트를 꺼내서 생수를 듬뿍 담았다. 평소에 쓰지 않는 하얀 스타벅스 머그컵까지 꺼내서 세팅했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차가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에 차를 마시지 않는 집이니까. 믹스커피나 돌체구스토 캡슐은 쌓여 있는데, 우아하게 우려 마실 수 있는 티백이나 잎차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것이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녹차 티백이라도 몇 개 챙겨둘걸... 꼭 마시고 싶은 순간이 정말 우연찮게 찾아왔는데, 상황이 도와주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은 꼭 차를 마셔야겠다.


지인의 신혼집 집들이 때 선물하려고 챙겨놓은 차 세트를 뜯어버렸다. 진작에 줬어야 하는데 당일에 까먹고 전해주지 못하는 바람에 여태껏 미루고 있던 터였다. 기회가 되면 다시 사주기로 하고, 오늘은 나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선물용이라 그런지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티백이랑은 차원이 다른 패키지가 등장했다. 히비스커스부터 얼그레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나마 가장 많이 들어본 캐모마일을 골라 포장을 뜯어보았다. 우와, 투명한 티백 안에 말린 꽃봉오리 같은 것이 큼직하게 들어 있었다. 열 번은 우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진한 향기도 났다.


티백을 컵에 넣은 뒤, 잘 끓은 물을 조로록 부었다. 몽글몽글 따뜻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근사했다.


"앗, 뜨거워!"


호호 불어 간신히 한 모금 마셨지만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까질 뻔했다. 아무래도 차는 인내가 필요한 음료인 것 같다. 차를 식히는 동안 커피포트를 다시 정리해 집어넣고, 밀려 있던 설거지도 하고, 그릉그릉 소리를 내는 고양이 빗질도 해주었다.


잘 준비를 하고서 침대맡으로 가져온 차를 한 모금 호로록 마셔보니 딱 알맞게 따끈했다. 침대에 기대앉아 어제 읽다 만 책을 펴 들었다. 요즘 침대에서 읽는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 그런데 혹시 책 선택이 잘못된 걸까? 은유 작가님의 어휘력에 감탄하며 페이지를 자꾸자꾸 넘기다 보면, 차를 마실 타이밍은 좀체 오지 않는다. 슬슬 졸음이 몰려와 책을 덮으려니 그제야 머그컵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싶어 얼른 한 모금 호로록 마셨는데, 이미 차게 식어버린 나의 캐모마일 티. 아주 뜨거울 때 한 번, 적당할 때 한 번, 차가울 때 한 번. 그렇게 세 모금밖에 마시지 못하고 나는 그냥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반 이상 남은 고급스러운 그 차를 싱크대에 조로록 따라버렸다.


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비슷한 과정을 반복했다. 난데없이 차에 대한 오기가 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그 고급스러운 캐모마일 티백을 한 번 우리고 버리기가 아까워서 잘 보관해 두었다가 사흘 정도를 내내 우려 마신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차는 점점 더 맛이 없어졌고, 여전히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배수구로 들어가는 양이 더 많았다.


나의 차 체험은 실패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차 마시는 것에는 재능이 없지만, 차를 우리기 위해 물을 끓이고 차가 식을 때까지 인내하며 책을 읽는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 즐거운 휴식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하루에 딱 세 모금씩이라도 차라는 것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인생은 작은 실험실 같다. 오늘은 이 옷을 입어볼까, 이 책을 읽어볼까, 이걸 먹어볼까, 여기에 가볼까... 하루하루 다양한 실험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과 영 소질이 없는 것들을 발견한다. 내가 잘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만이 성공한 실험은 아니겠지. 나는 이걸 싫어하는구나, 이걸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틀림없이 귀중한 순간이다. 모든 실험의 끝은 결국 행복한 삶으로 귀결되니 때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괜찮다.


이슬이의 일상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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