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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19. 2018

오징어 학대

내가 동물학대범이라니

나는 두피와 머리카락이 썩 건강한 편이 아니다. 여드름이나 비듬도 잘 생기고, 가렵고, 잘 떡지고... (으, 더러워) 그래서 두피에 좋다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샴푸들을 사용해보는 편이다. 그중 최근에 즐겨 쓰게 된 샴푸가 있는데, 러쉬(LUSH)에서 나오는 빅(BIG)이라는 제품이다. 천연 사해소금 알갱이가 들어 있어 두피를 시원하게 해주고, 축 처진 머리카락에 볼륨감도 준다고 해서 쓰기 시작했다. 나름 효과도 있는 것 같고 향도 좋아서 만족하지만, 실은 몇 가지 치명적으로 불편한 점이 있다.


1. 용기가 불편하다.

2. 유통기간이 짧다.

3. 비싸다.

 

나만 이렇게 불편한가, 내가 유난인가 싶어 검색을 해봤다. 와우, 저 세 가지 불편함이 한 가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러쉬 빅 샴푸는 '블랙팟'이라는 검정 통 안에 들어 있다. 사용할 때마다 손으로 적당량을 떠내야 하는데, 아무래도 물이 자꾸 용기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샴푸 변질이나 오염의 우려가 있다. 그냥 간편하고 무난하게, 남들 다 하는 펌핑 용기에 넣지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샴푸뿐만이 아니라 스크럽제나 바디로션 등도 대부분 같은 형태의 검은 통에 담겨 있다. 샴푸를 다 쓰고 나면 이 검은 통을 버리는 대신, 깨끗이 씻어 5개를 모아 매장으로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면 새 팩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것이다. 이 검은 통, 블랙팟은 이미 100퍼센트 재활용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고객들이 매장으로 들고 온 블랙팟은 또다시 재활용이 된다고 했다. 통이 돌고 도는 것이다. 자연스레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



러쉬는 또한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으로 유명했다. 2017년에 국내에도 관련 법이 제정되어 상황이 나아졌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잔인하고 잔혹한 동물실험을 하는 업체가 많았다고 한다. 러쉬는 사람이 쓰는 화장품을 위해서 동물을 학대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대신, 가장 깨끗하고 건강하고 신선한 꽃, 과일, 채소 등 천연 재료들로 화장품을 만든다. 화학 재료가 아니라 천연 재료들이니 유통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고, 원재료 값과 캠페인에 투자하는 비용 등에 의해 제품 값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러쉬의 브랜드 철학을 알고 난 뒤, 나는 러쉬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내 몸에 안전하고 동물을 해치지 않는 화장품을 쓰는 것은 스스로도 무척 뿌듯한 일이었기에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러쉬 제품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런 러쉬가 '동물실험 반대'에 관련한 강연을 한다고 해서 냉큼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건, 사실 러쉬의 강연을 들어서는 아니다.



이 강연을 기획한 '문화공간 숨도'의 대표님이 오프닝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래 오늘 1인극을 하기로 한 친구가 있었는데요,
오늘 주문진으로 오징어 축제 반대 시위를 하러 갔거든요.
그래서 1인극 대신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1인극 대신 상영된 영상에는 인간을 위해 무고하게 희생되어가는 동물들의 입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영상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하나의 단어만이 자꾸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기 때문이다.


오징어 축제 반대.


숨도 관계자는 분명 오징어 축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갔다고 했다. 나는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오징어 축제. 오징어 축제가 반대해야 하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였다. 잔인하게 토끼 눈에 마스카라를 바르는 실험은 나쁜 것인 줄 알았으면서, 구스다운 패딩을 위해 죽어야 하는 오리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으면서, 왜 산천어 축제에 가서 산천어를 잡는 건 즐거워했을까? 왜 나비 축제에 가서 사진을 찍느라고 너덜너덜 찢긴 나비 날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혼란스러웠다. 러쉬 관계자분은 90분에 거쳐 정말 유익한 강의를 해주셨지만, 나는 '오징어 축제 반대'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오징어도, 산천어도, 송어도, 나비도 다 똑같은 동물이고 생명이었는데, 유희로 그것들을 마구 소비해대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동물실험 반대 화장품을 쓴다고, 페이크 퍼 코트를 입는다고, 텀블러와 에코백을 쓴다고 그동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까지 지킬 수 있을까. 너무 어렵다. 인간답게 살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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