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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30. 2018

난 엄마처럼은 안 살아

언제부터였을까, 엄마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마 시작은 그날이었을 것이다, 우리 네 식구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날. 뒷좌석에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끝말잇기 따위의 시시한 게임을 하면서도 연신 키득대던 남매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리고 갓길에 갑자기 차를 세운 아빠는 몸을 뒤로 돌려 내 뺨을 후려갈겼다. 볼에 뜨거운 주사를 맞은 것처럼 따끔하고 얼얼한 기운이 퍼졌다. 별 같은 게 보인 것도 같다. 당황하고 얼떨떨한 일곱 살배기는 우는 법을 까먹은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날 아빠가 나를 때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와 굳이 기억의 조각을 찾아다닐 의지도 없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으니까. 뺨을 맞아도 되는 짓을 하는 일곱 살은 세상에 없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엄마는 그때 왜 아빠에게 화내지 않았을까. 엄마 팔뚝에 있던 파란 멍이 딸의 여린 볼에도 차차 내려앉고 있는데도. 창백해질 정도로 자기 입술을 깨무는 대신, “아니,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 하며 나를 때린 그 두툼한 손을 콱 깨물 순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장 내 손목을 잡아끌고 차에서 내려 어디로든 도망칠 순 없었을까. 그래,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분노하게 된 것은.     


혹 그날이 아니라면, 할머니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그 시기부터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집을 나와 외국으로 떠났고, 그 빈자리에 돌보는 이 하나 없는 당신의 엄마를 심었다. 몇 달이 지나도 아빠가 약속한 생활비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남매는 무뚝뚝하고 무능력한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나의 엄마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엄마를 위해 혼자서 밥을 짓고 돈을 벌어야 했다. 남편을 키우고 자녀를 키우더니 마침내 시어머니까지 키우게 된 것이다. 꼬맹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번 돈의 대부분은 할머니의 약값으로 나갔지만 일부는 술값으로도 나갔다. 술을 마시면 더 많은 약을 먹어야 했고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돈이 떨어지면 돈을 내놓으라고 술주정을 부렸다. 항상 술에 취해 있던 할머니는 한겨울에 솜이 빵빵한 점퍼를 입고 있는 손녀를 보면 “즈이들끼리만 따숩게 입고, 늙은이는 그저 얼어 뒈져야 속이 시원하것지? 씨부랄 것들.” 하며 방에 있는 자잘한 장식품들을 내동댕이치곤 했다. 장롱에 걸려 있는, 세탁소 비닐에 꽁꽁 쌓여 있는 가짜 밍크코트는 아마도 노인정에 갈 때만 입었던 것 같다. 할머니 생일이라고 무리해서 간 허름한 갈빗집에서는 기분 좋게 소주를 마시다가도 유리컵 대신 플라스틱 물컵을 내왔다는 이유로 서빙 아줌마에게 식기를 집어던졌다. 종업원과 주위 손님들에게 싹싹 비는 건 주정뱅이 노인도, 그 노인을 맡긴 아들도 아니었고, 무뚝뚝한 청소년은 더더욱 아닌,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고등학생 딸이 걱정된 엄마가 차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가 들킨 날에도 할머니는 “이 늙은이 병원 갈 때는 한 번을 태워다주질 않아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걸어 다니는데, 아주 지 딸년 귀한 줄만 알고.”라며 난동을 피웠다. 그렇게 한참을 집어던지고 욕을 한 다음에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정의 루틴이었다. 돈도, 남편도, 제대로 된 자식이나 며느리, 손주도 없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며 대성통곡을 하다가 곡조를 붙여 읊조리다가 그렇게 잠이 들곤 했다. 그 읊조림은 마치 저승사자의 노래 같아서, 나와 동생은 집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가급적 집에 머물지 않기 위해 24시간 독서실을 끊었다. 우리는 아빠처럼 도망친 것이다, 엄마만 집에 남겨둔 채. 엄마는 그때 왜 할머니를 집에 들였을까. 넷이나 되는 아들들이 하나같이 모른 체 외면하는 노인네를 왜 굳이 집으로 데려와서 명이 다할 때까지 돌본 걸까. 누군가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욕만 먹어가며 왜 맏며느리 행세를 한 걸까. 왜 나의 스윗홈을 악취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만든 거냐는 말이다. 구역질이 난다. 화가 난다. 나는 엄마가 사무치게 밉다.     


그래,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우리 남매가 성인이 되고, 아빠도 팔자가 폈는지 때때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할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던 그 무렵 말이다. 모처럼 평화를 실감했다. 집에는 하얀 강아지가 뛰어다녔고, 우리 남매는 더 이상 집이 싫지 않아 세 식구가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치맥을 하곤 했다. 가끔씩 아빠도 집에 들어왔는데, 이쯤 되니 내게는 그저 먼 친척 혹은 옆 건물에 사는 동네 아저씨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빠는 아주 잠시 머물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잠시라도 아빠가 들르겠다는 언질을 주면 엄마는 대청소를 하고 장을 봐서 갈비찜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내가 냄비를 뒤적거리며 “엄마가 웬일이야? 갈비찜을 다 하고?”라고 말하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아빠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며 속삭였다. 어쩌면 엄마는 아빠에게서 인정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당신이 집에 없어도 나는 내 가정을 이토록 윤택하게 돌보고 있음을. 식사 후 오늘은 넷이서 텔레비전을 보았고, 나는 그 구성원이 불편해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새벽 2시쯤 됐을까, 문득 잠에서 깬 나는 보고야 말았다. 현관 밖에서 웬 여자와 두런두런 다정스레 통화하는 아빠를. 그리고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숨까지 죽인 채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엄마를.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만한 단어를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수치심, 비참함, 모멸감… 유의어 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두 눈 질끈 감고 까치발로 다시 침대로 돌아온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서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소리 없이 외쳤다. 왜 그러고 있어?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왜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어? 왜 화를 내거나 이혼하지 않았어? 나는 엄마가 정말 싫어. 부끄럽고 창피하고 눈물이 날 만큼 엄마가 싫어.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게 정말 싫어.     


기도를 꽉 막고 있는 무언가를 토해내듯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두 틀렸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내가 엄마를 증오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만만하고 쉬운 사람. 그래서 분노를 뒤집어씌우기 딱 좋은 사람. 아무 죄도 없으면서 평생에 걸쳐 남편과 시모와 자식의 미움을 꿀떡꿀떡 받아 삼키며 살아낸 사람. 애지중지 키워놓은 딸이 제 어미를 스스로 미워하게 만들어버린 사람. 나를 악마로 키운 사람. 나는 가여운 엄마를 증오한다, 할머니보다 아빠보다 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테다. 나 같은 자식새끼도 낳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 같은 딸년은 과감히 버리고, 거지 같은 집구석도 내팽개치고 훌훌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그때는, 감히 내가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뜩이나 처연한 그 삶에 박힌 가시 하나쯤은 빼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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