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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Aug 23. 2019

영혼을 위한 돼지비계 김치찌개

남편의 소울푸드

"에잇, 요즘은 무슨 예능이 죄다 먹방뿐이야?"


남편이 리모콘의 채널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다가 기어이 짜증을 내고 만다. 본디 다정한 사람이지만, 요즈음은 부쩍 예민해진 모습이다. 이게 다 혹독한 다이어트 탓이다. 회사에서 나오는 점심 한 끼만 일반식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닭가슴살이나 삶은 달걀, 고구마 따위로 때운 지 어느덧 한 달. 매일 밤 끓여먹던 라면만 끊었는데도 초반에는 살이 쭉쭉 빠져 날마다 기분 좋게 체중계에 올라가더니만, 이제는 슬슬 정체기가 온 모양인지 며칠째 울상이다. 그런 남편을 괴롭게 하는 일등 공신은 바로 텔레비전.


언제부터인가 유행하기 시작한 먹는 방송, 줄여서 '먹방'이 온갖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각종 요리 관련 예능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뿐 아니라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맛깔스러운 현지 음식이 꼭 등장하고, 심지어 정글에 가도 먹음직스러운 가재를 구워먹는다. 하지만 진짜 복병은 따로 있으니, 바로 온갖 치킨집의 CF들이다. 요즘 텔레비전은 화질이 어찌나 좋은지, 방금 저녁을 먹었는데도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상황이 이러하니 남편이 아무리 채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여기저기서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애써 참아내는 남편이 기특하기도 안쓰럽기도 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기, 만약 지금 꼭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 거야?"


치킨일까, 햄버거일까? 혹은 라면이나 떡볶이?  어쩌면 달달한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일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이런저런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정작 답변하는 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연다.


"아빠가 해주는 김치찌개."


"아하!" 하고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렇다, 내 남편의 소울푸드는 바로 '아빠표 김치찌개' 그러니까, 나의 시아버님이 하신 요리다. 아내가 해준 것도 아니요, 어머님이 해준 것도 아니요, 아버님이 해준 김치찌개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 집 요리 담당은 남편이고, 시댁의 요리 담당은 아버님이다. 기왕 먹을 음식이라면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 두 남자의 공통된 지론이라서,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나는 자연스레 설거지 담당이 되었고, 경상도 출신의 어머님은 자연스레 전라도 출신의 아버님께 부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아버님표 김치찌개는 결혼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버님이 김치찌개를 끓이셨다는 전화가 걸려오면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저녁을 먹는다든지, 그런 날이면 꼭 식사 때 소주를 한잔씩 곁들이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건다든지, 그다음 날 아침에는 출근하다 말고 차갑게 식은 냄비를 열어 고기 몇 점을 건져먹는다든지 하는 남편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대체 그 대단한 요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내심 궁금해지곤 했다.


2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그와 가족이 되자마자, 나는 종종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시댁에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남편의 소울푸드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저희 왔어요, 아버님!"

"오냐, 아빠가 김치찌개 맛나게 끓여줄 테니까 거기 앉아 있어라."

부엌에선 이미 무언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아버님은 도마에서 큼직하게 썰어놓은 김치 한무더기를 냄비에 쏟아붓고 계셨다.

"너희 김치찌개 해주려고 이틀 전부터 베란다에다가 묵은지 내놓고 푹 익혔다. 그래야 맛이 잘 우러나거든. 이거 아주 좋은 김치야."


김치 다음으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은 바로 이 김치찌개의 핵심인 돼지고기다. 그것도 비계가 살코기만큼 많이 붙어 있는 아주 기름진 고기. 때때로 돼지껍데기라든가 다른 부속물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아버님 김치찌개의 시그니처는 바로 이 돼지비계다. 숭덩숭덩 큼직하게 썰어 냄비 속으로 풍덩풍덩. 양파와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비롯한 갖은 양념과 청양고추까지 더해지고 나면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한소끔 끓어오를 즈음이면 어느새 집 안 구석구석에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냄새가 배고, 배가 고프지 않던 사람의 입에도 침이 저절로 고인다. (이 문장을 쓰는 와중에도 침이 고였다) 타이밍을 좀처럼 놓치는 일이 없는 완벽주의 아버님은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찌개를 몇 번 휘휘 저은 뒤, 두부와 대파를 얹고 다시 뚜껑을 닫는다.

잠시 후, "간도 안 봤는데 맛이 있을랑가 모르겠다."라아버님의 무심한 말 속에 담긴, '간을 안 봐도 내가 이 정도야.' 하는 전라도인의 자부심까지 한 국자 크게 떠넣고 나면 드디어 식탁 한가운데에 냄비가 통채로 자리를 잡는다.


냄비 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과 함께 "히야!" 하고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적당히 걸쭉해 진하고 빠알갛게 우러난 국물에는, 돼지 비계에서 나온 고소한 기름이 둥둥 떠다닌다. 묵은지는 푸욱 적셔져서 주욱주욱 잘도 찢어진다. 그 빛깔이 하도 곱고 먹음직하여, 매운 음식을 보면 눈까지 매워져서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저절로 숟가락을 들게 된다. 김치 반, 고기 반. 좋은 재료가 아낌없이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남편이 했던 혼잣말이 떠오른다. 그날도 함께 아버님표 김치찌개를 먹던 중이었다.

"크으, 이 정도면 정말 식당 차려도 되지 않나? 조금 나이 있으신 어르신들은 단골 되어서 진짜 매일 오실걸?아, 아니다. 이 정도 재료 쓰려면 한 그릇에 이만 원 정도는 받아야 남을 거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나만 먹어야지."

혼자 중얼거리던 그의 말을, 이젠 나도 이해한다.


아버님은 이런 날엔 꼭 우리와 식사도 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이미 먹었으니 너희들이나 실컷 먹으라고, 마치 우리가 시식 평가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발 물러나서 반응을 살피시는 것이다.

"우리 이슬이 온다고 해서 내가 일부러 청양고추 두 개밖에 안 넣었는데, 어때 먹을 만 허냐?"

"네, 아버님. 너무 맛있어요! 아버님 김치찌개가 최고예요!"

무뚝뚝하고 게걸스럽게 밥을 퍼먹는 남편을 대신해서, 세상 모든 자식들을 대표해서, 내가 엄지를 척 치켜든다. 남편은 그런 아버님을 보며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나오도록 일부러 유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라며 투덜대지만,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해드리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려울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이렇게 풍성하고 맛있는 김치찌개 값으로는 턱없이 모자라기에 그 어떤 빈말이라도 척척 해드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빈말은 정말 아니었다.


이미 예순이 넘으신 아버님이 언젠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는 아마 향수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여섯 번쯤 먹고 싶어 하는 메뉴인데, 못 먹게 된다면 그리움은 서너 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아버님께 레시피를 완벽하게 전수받는다고 해도, 나는 이 맛을 절대로 낼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의 영혼을 채워주는 이 김치찌개는, 자식을 위해 며칠 전부터 좋은 김치를 골라 익히고 좋은 고기를 준비해 끓이는, 아버님의 진하고 얼큰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요리니까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남편이 가급적 오래오래 이  요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남편의 다이어트 결심을 무너뜨리고 그 예민함과 짜증까지 사르르 녹여버릴,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소주 한잔과 함께 탁 털게 해주는, 입에서 저절로 "크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게 되는, 그리하여 마침내 건조했던 마음까지 기름지게 만들어줄, 아버님의 돼지비계 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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