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슬의 취향 Oct 11. 2018

제주도 로맨스

미안하지만, 넌 너무 순수해

“어?”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전날 협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바비큐 파티 때도 마주 보고 앉아 자기소개를 했던 두 남녀가 우연히 이튿날 약 2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산방산 부근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마주친 것이다. 수많은 자리 중에서도 게스트하우스 스탭이 우리를 안내해준 곳은 이번에도 같은 테이블, 심지어 옆자리였다. 혼자 떠나온 여행지 제주, 그곳에서의 우연은 운명이었을까.     


혼자 하는 여행은 자유롭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아무도 배려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언제든 헤어진다. 그게 좋아서 늘 혼자 제주를 찾았고, 낮엔 혼자 해안가를 거닐다가 밤엔 왁자지껄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입에 친 거미줄을 청소했다. 전날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은 기억에 오래 담아둘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틀 연속으로 운명처럼 우연히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물론 두 번째 함께하는 술자리라고 해서 갑자기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거나 손을 잡고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다만 창원 사투리를 쓰는 이 남자애가 나보다 여섯 살 어리고, 이제 막 해병대를 전역해서 한 달짜리 전국 일주를 하고 있고, 여행 후에는 소방공무원 준비를 할 예정이며, <응답하라 1994>에 출연한 배우와 이름이 똑같다는 등의 몇 가지 정보가 어제보다 또렷하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이틀 연속으로 들은 이야기라서일까.     


테이블에는 서너 명의 불타는 청춘이 더 있었고, 우리의 우연을 안주 삼아 젊은이들의 소소하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두어 시간 오갔다. 제주도 흑돼지는 아주 쫄깃했고, 제주의 밤은 까맸다. 내 손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짙어질수록 취기가 올랐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테이블도 보였다.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 이슬이 너 내일 아침 비행기라며.”

나와 오늘 밤 같은 방을 쓰는 언니가 살뜰히도 나를 챙겨주었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한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11시 비행기. 근데 나 내일 어떻게 가야 하지? 버스 노선 찾아봐야겠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는 뚜벅이 여행자. 불편할 때가 많지만 버스 여행도 나쁘진 않다. 술자리 동료들이 친절하게 버스를 알려주려던 찰나, 묵직한 저음이 내 마음에 콱 들어와 박혔다.


“내가 데려다 줄게요.”


멘트는 달콤했고 목소리는 근사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투리까지 쓰고 있었다. 거기다 편안하게 차로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준단다. 하하, 나이스! 술에 취한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몇 번이고 그 남자애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내일 아침에 만나는 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냥 술김에 하는 말이면 안 된다고, 나는 정말 꼭 가야 한다고,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자연스럽게 그 애의 번호도 땄다.     


이튿날, 그 애는 약속을 지켰다.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먼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차 앞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듬직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공항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 지 사흘째 되던 그날에서야 비로소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다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그리 영양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들으며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마침 나는 남자친구와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다가 이별을 한 직후였기에 ‘사랑’ 그리고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던 시기였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노랫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것도 없다. 사랑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고 포기해야 하는 것. 나와 내 전 남자친구는 아마 포기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측건대, 걔는 그때 내게 반했을 것이다. 운전을 하면서도 무심한 듯 한 번씩 내 쪽을 향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랑 이런 대화 하는 거 처음이에요.”라는 그 애의 말에서 나를 향한 호감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아직 어린 남자애였다. ‘첫눈에 반했어요’라든가 ‘우리는 운명이에요’ 따위의 소리만 지껄여대는 20대 초반들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나의 노련한 원숙미에 빠진 게 아닐까.  

    

여유 있게 공항 근처에 도착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국밥을 대접했고, 뜨거운 몸국을 후루루 삼키며 이별 준비를 했다. 나의 제주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애와도 여기까지다. 잠시 동안 설렘을 느끼게 해준 그 애가 고마웠다.      


그 애는 나와 마음이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같지 않았다. 공항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빠이빠이 할 줄 알았던 그 애는 차를 세우고 내 짐을 들고 탑승 수속을 하는 곳까지 따라왔다. 나는 이런 모양새가 매우 어색했다. 마치 진짜 이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랑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까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니.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나보다 한참 키가 컸던 그 남자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지막 말로 나를 흔들었다.

“귀엽네요, 오늘.”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까 봐 서둘러 입국장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애는 아마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것 같다.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아쉬움보다는 안심에 더 가까운 숨이었다. 관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여행을 추구하던 내게는 아주 신선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극이 싫다. 목이 따끔한 탄산수보다 미지근한 녹차가 더 좋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한 순간, 내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잘 도착했어요?]

그 애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번호를 가지고 있었고 연락이 가능한 상태였다. 심지어 내가 먼저 우겨서 번호를 딴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던 전개가 아니었다. 내 설렘은 여행지에서 이미 끝났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 손가락이 저절로 답장을 하고야 말았다. 남자친구와도 막 헤어졌겠다, 이 애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겠다, 이 상황을 즐기려는 조금은 나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담백한 척을 하면서, 조금은 아쉬운 뉘앙스도 풍기면서, 나는 그 애를 밀었다 당기며 며칠간 그렇게 가지고 놀았다.     


퍼뜩 정신이 든 것은 문자만 하던 그 애가 내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마침 심한 기침감기에 걸려서 회사를 가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은 내 목소리가 심히 병약하자 그 애는 조금 화를 냈다. 왜 몸을 챙기지 않느냐고. 헤어진 놈도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화를 내주지 않았었는데. 조금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이 들자 조금 두려워졌다. 나는 약 때문에 몽롱한 정신으로 애써 물었다.


“호준아, 너 나 좋아해?” 
“아는 줄 알았는데.”


그 애는, 정말 그 애다운 대답을 했다. 툭 던지는 돌멩이 같은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할 말을 되찾았다. 할 말, 해야 할 말. 그러지 말라고 했다. 너랑 나는 어차피 안 되는 사이니까, 괜히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그 애는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을 했다. 왜 안 되는 것부터 생각을 하느냐고, 나이 차이가 뭐 어때서, 지역 차이가 뭐 어때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그리고 그 애는 그 애다운 말을 한 번 더 했다.


“누나는 나 안 좋아요?”


아, 왜 그때 대답을 못 했을까.      


두려웠다. 그 애가 나를 너무 많이 좋아하게 될까 봐, 나 때문에 그 순수한 영혼이 상처를 입게 될까 봐. 나는 이제 30대가 다 되어갔다. 저축도 해야 하고 사회에서 자리도 잡아야 하고 연애가 아닌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였다. 이리저리 재고 따질 것이 많았다. 내가 하는 노력은 결국 서로에게 끼워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달랐다. 호준이는 진짜 사랑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창원과 인천 사이의 거리를 극복해보려고, 스물셋과 스물아홉의 나이 차이를 극복해보려고 매일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하고 기타를 치며 내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아이는 근사했다. 반짝반짝 빛났다. 어쩌면 나도 저 나이 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아갈 수도 없다. 결국 나도 이 아이에게 빠지게 될 것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날 그 애의 번호를 지웠고, 다시는 그 애와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가정을 꾸렸다. 첫사랑은 중학생 때였고, 첫키스는 고등학생 때였고, 마지막 사랑은 지금의 남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사람은 첫사랑도 첫키스도 뭣도 아닌 그 애, 세상 가장 순수한 사랑을 보여줬던 그 애다. 가끔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애랑 연애를 했으면 어땠을까, 나도 그 애처럼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곧장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시답지 않은 연애를 하다가 시시콜콜한 일로 다투며 헤어졌을 게 뻔하다. 아름답고 찬란하던 그 애의 번호를 지운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녹차 같은 내 미지근한 일상은 이따금 떠오르는 그 짜릿한 기억으로 조금 더 재미있어지니까.

작가의 이전글 지수의 덕통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