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덕질
내가 아끼는 동생 지수는 요즘 김규림 씨에게 푹 빠져 있다.
규림은 독립출판 제작자로, 우아한형제들 문구팀의 마케터로 일한다. 물론 지인은 아니고, 만나본 일도 없다. 두 권의 독립출판물과 한 권의 기성출판물 작가로서 독립출판 신에서는 거의 셀럽에 가깝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서 표현되는 규림의 모습은 어딘가 자유로웠고 특별했고 근사해 보였다. 규림이 타고 다니는 전동 자전거라든가 취미로 즐기는 북바인딩, 야경이 근사한 원룸살이, 즐거워 보이는 회사 생활까지. 부러운 것투성이였다. 닮고 싶었다. 팬심을 담아서 나는 매력적인 규림의 일상을 즐겁게 탐독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지수에게 규림의 존재를 알린 것도 실은 나였다.
"지수야, 김규림 작가님이라고 알아? 나 요즘 이 사람 팔로우 하고 있어. 되게 이쁜 원룸에 산다?"
그 한마디가 지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줄이야.
지수는 가녀린 외모를 지녔지만 어딘가 단단한 느낌이 드는 소녀다. 그 어딘가가 어딜까. 아마 습관, 태도, 말투 같은 것들이리라.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처럼 성실하고 차분한 이미지. 심지어 지수네 집엔 텔레비전이 없어서 연예인이나 예능 같은 것도 잘 모른댔다. 나처럼 학창시절 H.O.T. 오빠들 때문에 울어본 일도 없을뿐더러 그런 애들을 한심하게 여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20대의 마지막 때에, 덕질을 시작한 것이다.
지수 같은 경우를 팬 용어로는 '덕통사고'라고 한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의도하지 않게, 심각하게 빠져버리는 것이다.
지수는 규림에게 반해도 단단히 반해버렸다. 수년간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남긴 규림의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정독하며 매력에 흠뻑 취하고 만 것이다. 나와 비슷한 증상이었으나 조금 더 심한 수준이었다. 규림이 사는 지역구, 쓰는 이불이나 문구류의 브랜드, 여행에서 머문 숙소 따위를 알고 싶어 하거나 추리를 통해 알아내곤 했다. 규림이 제작한 노트를 공동구매 하고, 규림이 다닌 북바인딩 학원에 같이 가자고 나를 조르기도 했다. 재미있거나 공감이 되는 블로그 글의 링크를 본인의 남자친구에게까지 계속 공유하는 바람에 애인이 질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지수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덕질을 자기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맬 정도였는데,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어느 날에는, 규림이 자신의 꿈에까지 나타났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규림의 실물이 아니라, 그녀가 저서에 직접 그린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정말 꿈마저도 너무 귀여워서 나는 한참을 키득댔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갑작스레 '빠순이'로 만들어버린 데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경험도 해보는 게 훨씬 더 다채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확실한 활력소가 되니까.
규림은 2018년 가을에 호치민으로 떠났다. 1년간의 파견근무랬다. 역시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지수는 호치민으로 여행을 가자는 내 말에 망설일 정도로 규림을 좋아했다.
"그런데... 규림님 보러 호치민까지 왔다는 말을 믿어줄까요? 아니, 오히려 스토커로 여기면 어쩌죠?ㅜㅜ"
나는 또 풉, 웃고야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볼 수 없게 된 규림(한국에 있어도 볼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을 그리워하며 지수는 블로그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규림과 같은 형식으로, 같은 글투로 글을 올리겠다고 했다. 나는 규림의 블로그 제목인 '뀰로그'를 향한 오마주로, 지수의 블로그는 '찔로그'라고 짓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내친김에 이름도 '김지수' 대신 규림과 한 글자 차이인 '김지림'으로 바꾸라고 권했다. 지수는 정말 규림을 만나면 지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또 박장대소를 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지수의 동경. 과연 그녀는 성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쯤 되면 내 요즘 덕질 대상은 지수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실물영접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