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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08. 2018

누가 이 병뚜껑 좀 열어주세요

명분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퇴근 후,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부리나케 지하철에 탔다.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아까부터 속이 영 좋지 않고 신물이 올라왔다. 수업은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된다. 버티려면 컨디션 회복이 필요했다.


역촌역에 내려 바로 보이는 역사 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속청을 하나 사들고 곧장 나와서 쓰레기통 앞에 섰다. 후딱 원샷을 해버리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람. 갈색 유리병의 뚜껑이 좀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아파서 기운이 딸리는 건가,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돌려봐도 손바닥만 아팠다. 손에 식은땀이 나서 이럴지도 몰라, 나는 원피스에 땀을 스윽스윽 닦고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어느덧 내 손바닥에는 붉은 피멍이 빨간 줄을 그리고 있었다.


'누구한테 부탁을 해야 하나...'

역사 안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에 설치된 벤치에는 할아버지 몇 분이 신문을 읽고 계셨다. 어르신들께 부탁을 해볼까, 하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누가 봐도 저 어르신보다 내가 더 튼실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 괜히 젊은 것이 뭐하는 짓이냐며 역정을 내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젊은이는 없나? 마침 지하철을 타려고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온 청년이 보인다. 훈훈한 외모의 대학생 같다. 그래, 저 사람이라면 미안해하지 않고 맘놓고 부탁해도 될 것 같다. 흠, 그런데...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면 어쩌지?'


나는 또 망설여졌다. 고작 소화제 병 하나 못 열어서 굳이 지나가는 훈남에게 부탁을 하는 모양새가 일종의 '작업' 거친 말로 하면 '개수작'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오해를 사긴 또 싫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업시간은 다가오고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냄새나는 쓰레기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두리번대던 나는 이번엔 젊은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같은 여성이라면, 분명 나를 도와주겠지!


혹시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난 이번에도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내 부탁을 듣고는 '내가 지금 댁보다 팔뚝이 두꺼워서 부탁하는 거야, 뭐야?'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후아... 내가 마른 체형이었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번 생은 아무래도 글렀다.


난 이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이대로 수업에 들어가서 토해야 하나. 아무것도 안했는데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세주가 등장했다.


내가 속청을 구입한 편의점 점장님(처럼 보였다)이 대걸레를 들고 무심하게 밖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저기, 이거 방금 산 건데요. 뚜껑이 잘 안 열려서... 혹시 한번 열어봐주실 수 있나요?"


우리 아빠뻘의 점장님은 대답도 없이 속청을 받아들고 힘주어 돌렸다. 잘 되지 않자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뚜껑을 감싸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곧 '빠각' 하는 작고도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됐다!!!" 하고 소리쳤다. 감사인사를 드리며 속청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완벽한 순간이었다. 속청이 아직 식도를 통과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얹혔던 것들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휴, 이토록 소심한 내겐 아무래도 무언가를 부탁할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아무리 작은 병뚜껑이라 해도. 내가 방금 당신에게서 구입한 물건을 a/s  받고 싶습니다, 라는 명분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오해받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이 피곤한 삶을 과연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아직 덜 아파봐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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