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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08. 2018

만 원에 두 켤레

퇴근길 나만의 소확행

퇴근길. 공항철도 검암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 통로에는 편의점과 빵집, 옷가게와 액세서리를 파는 잡화점 따위가 있다. 그 잡화점이 얼마 전 폐업을 하고 공간이 텅 비어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성 구두를 파는 가게가 되었다. 고급 구두 말고, 하나에 만 원짜리 싸구려 구두. 남자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사실 지하상가에는 여성 구두를 만 원에 파는 가게가 흔하다. 저렴한 걸 좋아하는 나지만, 이쯤 되면 만 원짜리 구두 앞에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형광색 도화지 위에 빨간 유성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쓴 글씨가 저 멀리서부터 보였다.


만 원에 두 켤레!


만 원에 두 켤레라니!? 그럼 한 켤레당 오천 원이라는 것 아닌가! 이건 정말 파격적이다. 신발 가게로 천천히 걸어오며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미 가게 안은 지나가던 아주머니들로 가득했다. 예전엔 아주머니들만 득시글한 곳을 감히 비집고 들어갈 엄두도 못 냈는데, 이젠 나도 새댁이 아닌가! 곧 결혼 1년 차에 돌입하는 유부녀는 용감하게 틈바구니를 뚫고 무사히 가게 안으로 안착했다.


나는 여자 치고는 조금 큰 사이즈인 245. 마음에 드는 구두가 몇몇 눈에 띄었다. 유부녀가 되고 살도 찌는 바람에 아찔한 하이힐은 포기한 지 오래. 오늘도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낮은 단화들이 내 타깃이 되었다. 


무난한 검은색이 좋을까 아니면 차분한 베이지가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아차, 만 원에 두 켤레니까 둘 다 사면 되겠네!' 하는 엄청난 깨달음과 행복감을 얻고 고민을 중단했다. 싸구려답게 검정 비닐봉다리에 구두 네 개가 포개진 채 들어앉았다. 나는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왔다.


이튿날 아침, 새 구두에 발을 넣었다. 아침이라 부기가 빠져서 그런지 어제보다 헐렁한 것 같다. 열심히 걷는데 자꾸만 신발이 벗겨질 것 같아 걸음이 저절로 느려지고 긴장이 되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회사 근처에 있는 구둣방에 가서 뒤꿈치에 붙이는 자그마한 깔창을 하나 샀다. 


"얼마예요?"

"오천 원."


쿡,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로써 이 신발은 만 원짜리가 되었다. 뒤꿈치에 깔창을 덧대고 나니 발에도 한결 편안하게 맞는다. 새 구두를 신고 회사에 가니 동료 여직원들이 알아봐주며 예쁘다고 한마디씩 한다. 가격을 듣고 나니 더 놀란다. 오천 원짜리 깔창 이야기를 듣더니 깔깔 웃었다. 싸고 예쁜 구두를 산 나 자신이 언제나 자랑스럽다. 


'쟤라고 꼭 싼 것만 좋아하겠어?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합리화하는 거겠지.'라고 혹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실은 나도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돈만 있으면 번쩍번쩍한 로고 딱 박힌 명품 구두 사고 싶지만, 가난하니까 싸구려 구두로 만족해야겠다고.


그런데 언젠가 먼 친척 어르신이 대학 졸업선물로 백화점에서 구두를 사주신 적이 있다. 반짝거리는 인디핑크 빛 에나멜 하이힐이었다. 명품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백화점에서 파는 값비싼 구두 자체가 처음이어서 너무 설레고 또 긴장이 되었다. 좋은 구두가 그 사람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더니, 나도 이제 꽃길만 걷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걸음걸이.


나는 걷는 게 정말 엉망진창이다. 길에 잠시 앉아서 쉬고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에도 걸려서 넘어진다. 일부러 걸리려고 애써도 어려울 것 같은 아스팔트의 작은 틈도 나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심지어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부딪히는 접촉사고를 내기도 한다.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습관 탓에 내 운동화 밑창은 언제나 구멍이 나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엔 낭패를 본다.


친척 어르신이 사주신 좋은 구두를 신는다고 내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법은 없었다. 반짝이는 에나멜 하이힐을 신었어도 나는 여전히 나라서 개미처럼 작은 돌멩이에도 걸려 넘어졌다. 반질반질하던 구두에는 몇 시간만에 까만 스크래치가 났다. 싸구려 신발에 난 상처보다 몇 배는 더 꼴 보기가 싫었다. 그날 깨달았다. 내 걸음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비싼 구두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난 그냥 마음 편하게 싼 구두나 신고 다녀야지. (이 와중에도 내 걸음 습관을 구두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키득키득.)


저렴한 구두를 사 신는 건 돈을 절약하는 측면 외에도 꽤 많은 장점이 있다. 싸니까 편하게 마구 신다가 버려도 죄책감이 들지 않고, 버리면 또 새로 사서 신으면 되니까 스타일이 질리는 법도 없다. 우리 집 고양이가 질겅질겅 합성피혁에 이빨 자국을 내도 마음이 엄청 쓰리지 않다. 무엇보다, 30여 년을 걸어온 내 걸음을 애써 바꾸지 않아도 된다.


며칠 뒤, 만 원에 두 켤레를 팔던 그 가게는 다시 정상 가격인 만 원에 한 켤레로 돌아갔다. 그때 사길 정말 잘했다. 오늘도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구두를 질질 끌면서, 당당하게 그 길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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