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배워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 질문]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니 이 아니 즐거운가! 벗이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 1)
<논어>의 첫 장은 인생의 출발점으로서 '학이시습지(學而 1장)'로부터 시작된다. 공자의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
억지로 하는 공부, 생존을 위해 하는 공부는 그다지 즐겁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학(學)은 대학생이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공부와 취업을 하기 위한 공부였다. 배우는 것에 최선을 다했으나 그 과정이 즐겁지는 않았다. 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으니, 한 단계를 넘으면 또 다른 경쟁이 있고 이후엔 더 큰 경쟁이 있기에 즐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어 보인다.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끝없는 경쟁이 일상화가 되어버린 치열한 경쟁사회이자 밀고 당기는 화합이 아니라 밀어내고 떼어 내는 갈등사회다. 배움의 목적에 사회적인 생존을 포함한다면, 배움이 즐거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그럼에도 공자는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는 삶이 즐겁다고 말한다. 과연, <논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공자의 '학(學)'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배움의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닮았다. 그 중심은 사람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성을 담은 마음으로 임하는 <논어>가 재조명되는 이유 중 하나다.
벗의 의미는.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벗(朋)'은 그저 친한 벗이 아닌 학문을 교류하고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말한다. 동년배 친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일 수도 스승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지금껏 학교나 직장에서 많은 친밀한 '벗(友)'을 만났다. 하지만 서로의 나이, 학벌, 직장을 알고 시작하는 만남은 어딘가 솔직해지기 어렵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그들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은 채 친밀함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공자의 '벗(朋)'을 앞서 배움과 연관시키면 나와 배움과 실천이 일치하는 사람,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계씨 4장'에서 '정직한 벗,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벗 그리고 견문이 넓은 벗이 유익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나의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나와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난다는 것, 그 '벗'과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필로어스(Philous) 위대한 질문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일주일 만에 <논어>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온전한 '나'로서 누군가와 교류한다는 것이 새로웠고,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나 생각을 공유하는 경험은 짜릿했다. '왜?'라는 질문에 고민하던 순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