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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 Dante Mar 11. 2020

따뜻한 밥 한 그릇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 어느 날의 일이다. 직장에서 어쩌다가 계획에 없는 야근을 하게 됐고 저녁밥을 챙겨 먹지 못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아내에게 밥을 달라 했다. 아내 왈 밥이 없다는 것이었다. 밥이 없다고? 아니 사람 사는 집에 밥이 없다고?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저녁 늦게 와서 밥을 먹겠다고 미리 내가 자기에게 얘기하지 않기에 나를 위한 밥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녁밥을 집에서 먹지 않을 걸 알면서 밥을 해두면 식은 밥이 되어 처치 곤란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는 새로 밥을 하려면 쌀을 씻어서 안치고 기다려야 하니 그냥 라면으로 대신하란다. 그때가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내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가슴을 스치는 것은 찬바람이었다.


라면을 앞에 두고 앉으니 가슴을 스치는 찬바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집에 들어와서 밥을 찾았을 때 밥이 없던 때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사소한 일이었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무엇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데 하루를 분주히 보내셨다. 그 많은 일중에 어머니가 가장 챙기시는 것이 밥이어서 하루 세끼를 준비하시는 것을 무엇보다 큰일로 삼으셨다. 식구들 밥 잘 먹고 건강한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아시는 분이어서 특히 먹거리 마련에 공을 많이 들이셨다.


당연히 우리 집에는 어느 때든 밥이 있었다. 봄가을이면 부엌의 솥 안에, 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바구니에,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의 이불 안에 밥그릇이 뚜껑이 덮힌채 두세 개씩은 꼭 있었다. 식구들이 밖에 나가 있다가 밥때를 놓치고 언제 들어와도 바로 밥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든 밖에 있다 들어와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밥이 있다는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밖에 나가 공부하고 사회생활하며 일하는 식구들을 항시 마음에 두고 계시는 어머니가 그 밥에 쏟은 정성과 기원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해 분가해서 살게 된 이후 그날 처음으로 내 집에 들어와도 내 몫의 따뜻한 밥 한그릇이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그 순간 찬바람이 마음을 스쳐간 것이다. 나를 위한 밥 한 그릇이 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 곧 나를 향한 아내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을 굳이 아내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운함이 라면을 먹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를 사로잡은 것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집에 와서 밥을 먹어야 할 때는 직장을 나서기 전 집에 꼭 미리 전화를 걸었다. 어떨 때는 내가 내 집에 들어가 밥 먹는데 미리 신고하고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그냥 전화를 하지 않고 혼자 집으로 오는 길에 밥집에 들러 한 끼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세상은 늘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지향한다. 아내의 행동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세상사는 최상의 법칙은 아닐 듯도 한데 나는 그런 아내에게 그 주장을 내세워 늘 집에 밥을 해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어렵기도 했고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는 일로 아내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스스로 알아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밥을 남겨두는 것을 은근히 기대해 보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해 겨울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온 어느 일요일 오후. 아내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가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가는데 그때쯤 집에 올 거라 예상했던 아내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그때 우리는 서울의 나지막한 산동네 아래 단독주택의 작은 문칸방에서 신혼살림을 나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 나가 쌀을 씻어 불리고 솥에 밥을 안쳤다. 아내를 기다리다 할 수 없이 먼저 밥을 혼자 차려먹고 아내의 밥상을 따로 차려서 윗목에 놓아두었다. 아내의 밥 한 그릇은 아랫목 이불에 넣어두었다.

 

예정보다 늦게 끝난 모임에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차가 막혀 밤늦게야 지쳐 돌아온 아내는 그 밤 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아랫목에 넣어둔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늦게 퇴근하며 집에 가서 밥 먹겠다는 전화를 하자 아내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미리 전화하지 않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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