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고 살자는 짓인데.
학부 4학년, 진지함이라고는 1도 없이 경험했던 첫 창업의 실패가 얼마나 쓰라렸는가 생각하면 솔직히 민망하다. 현실감각도 없고 역량도 부족하고 책임감도 없었으면서 실패에 충격을 받았다는 게 너무 웃기고, 또 내가 얼마나 철없고 뻔뻔했는지 실감이 난다. 그 이후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하면서 후배들의 나이브함에 혐오감을 느끼곤 했다. 내 상처의 반작용으로 많은 90년대생에게 상처를 남겼는 지도.
'진지함'의 내용을 해부하다보면 결국 그 본질은 조직의 sustainability를 보장하는 현금 흐름에 닿는다. 24살 이후 나의 모든 의사결정은, 그런 의미에서의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조직의 지속가능성 이전에 내 한 몸의 지속가능성. 이걸 장기적 관점에서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솔루션을 찾는 것이 그 이후의 모든 행보를 만들었다.
1차적으로는 스펙을 쌓는 것. 즉, 언제 어디서든 팔리는 백그라운드와 그에 상응하는 임금 수준을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했다.
20대에 난 패션으로 사회적 역량(전공)을 쌓기 시작했지만, 계열은 자연계열이었다. 나름 수학적 기량이 있는 상태에서 예술에 심취해 있었고, 예술을 상업적으로 푸는 패션이 좋았다. 다소 주관적이고 이상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 커리어 관리보다는 그때 그때 궁금증이나 갈증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경험을 쌓고는 했다. 그러고나니 30대를 앞두고서 이력이 중구난방으로 맥락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해서 그간 해 온 걸 부정할 수도 없었고 딱히 나의 성향이 대단히 현실적으로 변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은 패션이나 예술적 관심을 사업모델로 변환하는 데에 집중했다. 원초적 궁금증들을 모두 한데 모을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오픈 소스 제품 개발 방법론) 인더스트리를 제조업으로 한정해 꾸준히 모델을 디벨롭했다. 당장 현실성이 있건 없건 간에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관심사들을 구체화하고 논리를 부여하고 현실의 주제들로 변환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스킬셋을 관리했다. 여러 흥미에서 30대의 시작에 SAP ERP 관련 자격증을 두 개 취득하고 시스템을 유지보수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모바일 서비스를 기획하고 DB 아키텍쳐를 설계한 경험을 바탕으로 IT 아키텍쳐 설계 역량을 꾸준히 보완했다. 업무 틈틈히 Enterprise Architecture, ITSM, Cloud system architecture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최근에는 Project management 자격증을 취득해 두었다. 그 사이에 기업의 IT 전략을 수립하거나 IT 현황을 평가하거나 시스템을 구축하는 업무 경력도 쌓았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내겐 현금흐름 준비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런 1차적 준비를 통해 나 한 사람에 대한 금전적 가치 평가의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불안감을 다스릴 수 있었다.
2차적으로는, 어떤 재미있는 시도를 하기 위한 전제로서 자본을 투입하고 현금흐름을 만드는 시스템을 많이 고민한다. 쉽게 말하면 반드시 팔리는 것을 발견해 꾸준히 팔리게 만드는 것인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특히 '멋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개입되면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더 어렵다. 우리는 자꾸 멋있는 척을 하는 본성이 있으니까.
담백하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고자 되뇌이는 말. 그냥 먹고 살자는 짓이다. 일단 먹고 살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