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프로세스, 시스템 - 그리고 정보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처음에 이해는 그랬다. 예쁜 '무엇'을 그리고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 예쁜 것을 '계속' 만드는 행동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조직'이 예쁜 것을 만들도록 하는 것. 처음 나에게 디자인의 범위는 그랬다.
디자인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이 몸으로 느껴진 건 꽤나 긴 시간이 지나고서였는데 그 시점에 깨달은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의 한 가지는. 내가 디자인, 심미성에 그토록 자긍심 내세워 왔는데도 불구하고 트렌드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는 점이었다. 팔리는 디자인의 구성과 그 이유, 시장의 취향이 어떻게 형성되고 흐르는 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동안 사람들의 시선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역에서 예쁜 형태란 무엇인가, 그 형태의 아이디어를 얻고 다듬는 방법에만 몰두했던 걸 깨달았다. 한켠으로는 창의성과 독창성(originality)의 구분이 모호해서 기존 시장에 없던 것을 추구해 온 결과이기도 했다. 나같은 초년생 디자인 애호가가 사실 의외로 많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 것이 아트와 상업 디자인의 경계에 있는 디자이너의 고집일런지도 모르겠다.
불행의 시작은 모름을 견딜 수 없는 데에서부터. 사실 처음엔 그런 고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디자인이 개성이고 곧 제품의 캐릭터이며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믿었다. 시장은 디자이너의 선도를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나의 생각에 동료들도 동의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관점이 조직 분위기로 자리 잡을수록 디자이너의 역할은 제한되고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신만의' 세계에나 집중하시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해결할테니. 괜시리 '당신만의' 세계가 방해받지 않도록 힘쓰시오. 뭐 그런 대우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내가 조직에서 장사나 체제에 무지한 역할에 메일까봐 필요 이상 조바심을 냈다. 곧 고민의 포커스는 '왜 디자이너가 힘 없는 역할로 치부되는가'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역할이든 조직이나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효용이 타 역할의 효용을 웃돌아 우선 순위를 점령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은 자주 '우리가 쌔빠지게 디자인해봐야 결국 경영진 취향대로 결정된다'는 푸념을 한다. 시대의 일부는 물론 디자인에 포커스를 맞추고 점점 디자인 중심 체제로 전환해 가는 분위기이지만, 역할의 효용에 대한 이해 없이 디자인 중심 체제에서 제 역할을 다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면 object module이 정의하는 디자인의 효용은 무엇이고, 또 디자이너가 업의 효용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질문은 곧 1. 무엇,과 2. 어떻게, 3. 얼마나,로 요약된다.
근본적으로 '무엇'에 관한 고민은 '왜'에 연결되어 있고, '디자인'의 한쪽 끝은 '예술'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역순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면, 예술의 왜,와 무엇,은 그런 것 같다. 세상에 남들보다 감각과 인지가 조금 더 예민한 이들이 어떤 사회적 변화라고 일컬어질 규모의 패턴을 감지한다. 그 패턴을 과거 존재했던 다양한 패턴에 근거하여 규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를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설득해 실제 변화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감성적, 감정적 커뮤니케이션의 온갖 방식을 구사한다. 어떤 이는 시각 소스로, 어떤 이는 음향 소스로, 어떤 이는 언어 소스로, 어떤 이는 기술 소스로...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영역은 비단 음미체의 테두리 안에만 한정지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어떤 시스템에 대한 발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발생 빈도가 우리가 자주 접할 수 있는 그림이나 음악처럼 잦지 않을 뿐이다.
디자인은, 한켠 이 예술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좀 더 실생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도구로서 역할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현실에서 실제 효용을 체감할 수 있는 물건이나, 대중문화, 어플리케이션 등의 형태로 설계되고 판매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의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 및 사업 모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사회적 변화의 선봉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디자인은 예술의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시장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 예술이 제시한 방향성과 메시지를 현실에 구현하는 디자인의 성패는 시장에 받아들여지느냐로 평가내릴 수 있다. 시장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소화하고, 표현하여, 전달하는 것까지 균형있게 수행해 내야 한다. 이로써 디자인의 효용이 생겨나는 것이다.
디자인의 퀄리티는 '다양한 주제를 소화하고 주어진 작업 시간을 효과적으로 매니지먼트하여 제시한 결과물에 대해 시장에서 사용자가 거래의사를 갖는 정도'를 이른다.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은 '퀄리티의 굴곡이 없이 지속적으로 아웃풋을 내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었음'을 이른다. 이 정도의 수준에 굴곡이 없으려면 반드시 작업의 프로세스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디자이너의 프로페셔널함은 스스로의 작업 프로세스가 확립되어 있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창의성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오해는 창의=불규칙함, 내지는 창의=이상한 것으로 정의내리는 것이다. [창의성]으로 평가받으려면 그 액션은 반드시 생산적이어야 한다. 어떤 결과물을 제시하거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거나 의미적 가치를 부가하는 등의 value addition이 일어나야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페셔널한 창착자라면 이에 대한 이해를 갖고 적합한 작업 프로세스를 갖출 것이다.
개개인마다 업무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라 이것이 좋다,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은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과정은 있다. 창작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부가될 가치가 무엇이냐 등에 따라 과정의 추가/제외는 있겠지만 그런 변동과 무관하게 어떤 프로세스의 기본은: [인풋을 투입하여 아웃풋을 배출한다]. 창작 프로세스도 예외는 없다. 주제와 범위를 정하고 소요되는 인풋과 목표하는 아웃풋의 가이드라인을 잡는다. 그리고 인풋을 수집해 어떤 질서 정립과 변형의 과정을 거쳐 아웃풋을 도출한다. 이 모든 과정 중 object module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풋의 수집, 즉 리서치 단계이다. 리서치의 범위와 깊이에 따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제한되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충분한 리서치를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수집된 자료는 조직 내의 knowledge 시스템 구축을 위해 정리해두어 향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디자인 프로세스에 관해서는 워낙 훌륭한 이론과 실무사례가 많이 있고, 또 세부 영역으로 들어가면 프랙티스에 차이가 많이 나므로 이곳에 몇 줄로 정리할 일은 아닌 고로. 최근 읽어본 중 publy 플랫폼에 게재된 '브랜드 디자인: 촘촘한 실무의 단계들 - book curated by PUBLY, 홍시출판그룹, 홍동희' 컨텐츠의 [제 5장 디자인 프로세스] 글을 추천한다. 해당 챕터는 무료 공개되어 있으며 publy 사이트에서 검색하여 볼 수 있다. 작가와 publy 플랫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추천하는 것이라 글의 보다 상세한 내용은 적지 않았다. (혹시 문제가 될 경우, 게재 방식에 대해 참고할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레버리지, leverage의 레버, lever는 우리말로 지렛대이다. 레버리지라 함은 지렛대 역할을 하는 보조적 방법을 강구하여 자신이 온전히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자본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결과의 크기를 확장시킨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금융 투자를 할 때에 수익성이 크게 기대되는 프로젝트라면 빚을 얻어 자기자본 이상의 규모로 투자를 하고 그 결과물로부터 얻은 수익에서 빚에 대한 이자를 제한 만큼 수익을 남기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빚이 지렛대 역할을 해 나의 온전한 저기자본이 할 수 있는 범위보다 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 빚을 얻기 위한 자격조건, 투자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거둘 수 있는 결과물의 크기를 극대화하는 방법에 해당한다. 이왕 한 번 체계를 구축하고 일을 할 적에 성공이 짐작된다면 판을 좀 더 크게 가져간다는 전략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물론 지렛대를 갖추는 비용과 실패했을 때 손해의 크기가 더 커질 것이라는 위험부담 또한 늘어난다.
보편적으로 디자인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변동비 성격을 갖는 디자인 인력 고용비의 비중이 크다. 따라서 매출이 증가할수록 더 많은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비용이 증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의 디자인 노력을 투입하면 1의 디자인 아웃풋이 나오는 형태로 디자인 자체의 수익성을 증대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를 개선하고자 object module이 제안하는 디자인 레버리지는 일종의 운영 레버리지(operating leverage)라 할 수 있다. 운영 레버리지는 제조업과 같이 물리적인 기계설비를 지렛대 삼아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기계설비 등의 고정 자산의 비용은 고정비 성격을 갖기 때문에 한 번 지출되고 나면 매출의 증가와 관계없이 추가 지출이 없다. 따라서 고정비를 커버하고 난 초과 매출은 기업의 순수한 수익이 된다. 이와 같은 비용구조를 갖춰 디자인 레버리지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object module의 전략이다.
object module은 디자인 activity와 디자인 아웃풋의 관계를 1:1이 아닌 1:n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디자인 비용의 성격을 변동비에서 고정비로 전환하고자 한다. 즉, 1차 디자인 아웃풋으로부터 2차 파생 아웃풋을 발생시켜 한 번의 디자인 activity로부터 다수의 아웃풋을 창출해 디자인 효용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의뢰받은 디자인을 완성하는 방식과는 사실상 차별되는 비용구조를 갖는다. 기존의 디자인 비용은 변동비 성격을 가져 기업의 매출이 커지면 비용도 함께 커지던 것에 비해 디자인 레버리지 비용구조에서는 매출액이 커질수록 고정비의 비율이 줄어들어 수익성이 좋아지게 된다. object module은 이같은 디자인 레버리지를 달성하기 위해 디자인 소스 모듈과 생산성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설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레버리지 시스템은 1차 디자인 아웃풋을 모듈화하여 관리하고, 이에 내부의 룰을 적용해 2차 파생을 발생시키고, 파생 아웃풋을 제품화 한 후, 생산과 판매 시스템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합리적이고 빠르게 진행하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있다.
object module이 디자인 레버리지를 실현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협업collaboration이다. object module의 협업은 전문 크리에이터나 유명인과의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디자인 수준을 제고하고 홍보 성과를 거두는 것만을 이르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품을 직접 착용하는 사용자가 snapXsnap 커뮤니티를 통해 디자인 협업의 파트너로서 활동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snapXsnap 제품 라인은 object module 내부의 디자인 소스를 직접 소비자가 선택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일률적인 완제품이 아니라 개별 디자인 모듈을 소비자가 선택적으로 조합하여 구매할 수 있는 마켓 플레이스를 구축하고자 한다.
object module이 모듈형 제품구조를 택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object module 브랜드의 의류는 백지 상태의 티셔츠와 결합 가능한 디자인 부속품을 선택해 사용자가 자신의 옷을 스스로 디자인함으로써 다양한 파생 디자인이 발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object module제품의 구조', 'object module의 팔레트', 'snapXsnap' 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한켠, 제품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또는 개인화personalization 측면에서의 소비자 니즈에 대한 대응방안이기도 하다. 특히 패션 의류는 개개인의 취향과 표현 욕구가 반영되기 쉬운 제품이기에 적절한 환경과 소스가 제공되면 디자인 다양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