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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Dec 15. 2021

대(代)를 이어 구전된 서러움

엄마가 20대였을 시절, 지금부터 약 40여년 전, 1980년대, 물을 마시고 싶으면 아무 집 문을 두드려서 물 한 잔만 달라고 할 수 있었다던 그 시절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쫄딱 젖은 엄마는 급히 비를 피하기 위해 길가에 보이는 한 약국에 들어갔다. 비가 와서인지 손님이 한 명도 없던 약국 입구에는 누가 봐도 주인이 없어 보이는 우산이 있었다. 엄마는 바로 갖다줄테니 잠깐만 빌려 쓸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약국에서는 매몰차게 엄마를 쫓아냈다. 재차 물었지만 재차 안 된다고 했다. 당장 나가라며 밀쳐냈다. 순박했던 시절, 그러나 불행히도 결코 그렇지 못 한 사람을 찾아간 죄로 엄마는 다시 빗발 한 가운데로 내쳐졌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그 여인은 추워서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부등켜 안고, 아니 몸보다 더 시리는 마음을 붙들어매고 다시 빗속을 뛰어야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벌써 40여년이 지났지만 엄마는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그렇게 서러웠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얼마나 서러웠으면 이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은 하셨다. 어쩌면 나도 미래의 내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것이고 그렇게 1980년대 어느 비 오는 날의 사건은 100여년에 걸쳐 한 가족의 입을 통해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대(代)를 이어 구전된 서러움은 어떤 것일까. 그 때 그 약국 사람은 자신의 무심하고 일상적이었던 작은 행동에 상처를 받아 세대를 걸쳐 곱씹는 가족이 있다는 걸 알까. 알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부끄러울까. 미안할까. 이제 와 주저리 주저리 사연을 말하며 변명을 할까. 아니면 기억하지 못할까.



얼마 전에는 엄마와 비행기를 타는데 우리 좌석 위쪽 수납공간이 가득 차 뒷좌석 위쪽 수납공간에 캐리어를 넣었다. 그래도 마침 캐리어를 넣을 공간이 딱 하나 남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착륙 후 벌어졌다. 행동이 빠른 한국인들은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고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마자 일제히 일어나 복도에 줄을 섰다. 그러다보니 뒤쪽에 있는 가방을 꺼낼 수가 없었다. 비행기 문은 열리지도 않아서 더이상 앞으로 갈 공간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앞쪽으로 압축 또 압축해서 몰려왔다. 바로 뒤쪽 수납공간에 있는 캐리어 하나 꺼내자고 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영영 못 나가겠다 싶었는지 엄마는 줄도 서지 못 하고 의자와 의자 사이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뒷좌석 짐칸 쪽에 줄을 서있는 내 또래의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캐리어를 꺼내게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비좁은 의자 사이에서 간신히 서있는 엄마를 그 사람은 그저 차갑게 쳐다보기만 했다. 싫다 좋다 표현도 없이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지도 않고. 이미 앞쪽에 줄을 서서 압축되어 있던 나는 엄마의 캐리어를 꺼내줄 수도 없고 그 사람에게 다시 양해를 구할 수도 없이 사람들에 밀려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엄마가 먼저 캐리어를 끌고 나오고 그 사람이 엄마 다음으로 나와야 하는 게 맞았지만 그 사람이 나오고 몇 사람이 더 나온 뒤에도 엄마는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캐리어를 끌고 나온 엄마에게 정황을 들어보니 그 사람은 엄마의 얘기를 쉽게 무시했고 어쩌면 엄마의 부탁을 들었을 그 뒤의 사람들도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 어떤 키 큰 아저씨 한 명이 엄마의 캐리어를 내려주어서 그제서야 나올 수 있었다는데 상황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고 내 마음 속에는 분노가 차올랐다.


아주 작은, 사소한,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단 1초의 친절함이 있는 반면 똑같은 찰나의 매정함있다. 누군가는 친절함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누군가는 매정함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사연을 공유할 만한 여유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결국엔 친절하거나 매정한 결과만이 남는다. 단 1초의 친절함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보듬어줄 따뜻함이 되기도 하고 단 1초의 매정함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두고 저주할 앙심이 된다. 더군다나 잘못하면 위의 사례처럼 어떤 가족 대대로 나의 짧은 행동이 반면교사의 사례로 구전될 수도 있다. 단 1초의 선택으로 어떤 쪽의 삶을 살지는 순전히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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