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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인경 Sep 19. 2019

1-1. 아이만 바라보면 잔소리만 늘어난다

<나는 성장하는 엄마입니다>

<나는 성장하는 엄마입니다>


[1] 애 키우기도 바쁜데 자기계발은 무슨?

   1. 아이만 바라보면 잔소리만 는다     


 “내가 나 낳아달라고 했어? 인생은 고해라며? 근데 왜 나를 낳아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는 건데? 아빠·엄마가 어쩌다가 만든 거잖아.” (출처: 조선일보 윤희영의 News English)     

 인도의 27세 청년 라파엘 사뮤얼은 자신의 동의 없이 부모가 자신을 낳았다며 고소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자식을 강제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은 유괴 납치 및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부모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아이가 태어나 학교생활과 구직이라는 복잡하고 기나긴 고행을 겪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라파엘은 부모님이 크게 원망스러워서 뱉은 말은 아니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변호사이고 셋은 사이가 좋다고 한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가졌던 생각을 세상에 공유한 것뿐이다. 학교 가기 싫다는 그의 투정에 부모님은 가라고 떠밀었다. 왜 가야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적절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BBC의 한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 “태어나서 불행하다는 것인가?” 라파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내 인생은 좋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존재일 수 있었다. 더 좋은 방이 있다는 걸 알면서 지금 이 방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들의 이러한 고소 사건에 대해 그의 어머니는 변호사다운 답변을 덧붙였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아빠·엄마가 어떻게 너에게 사전 동의를 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다면 내가 내 실수를 인정하마.”     

 이 기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세계적으로 이슈화 될 만큼 대단한 생각을 가진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다섯 살 때 깨달은 생각을 꾸준히 자기 논리화 시키며 세상에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들의 이러한 생각에 충격은커녕 논리적으로 받아쳐준 어머니의 재치 있는 대답 또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당사자가 처한 현실이 심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현재 무척 심각하다는 것에 있다.      

 “인생이 뭔지, 아, 죽고싶다. 이놈의 공부!” 

 “공부는 왜 해야 해요?”

 “공부 공부 공부, 엄마는 맨날 공부만 하래요.”

 “어른들은 왜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몰라.”

 “이것 끝나면 또 학습지 선생님 오시니까 빨리 가야 해요.”

 “엄마는 저한테 관심이 없어요.”     

 이것은 내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들었던 말들이다. 이 아이들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라파엘처럼 고행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의 틀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하는 인형이이나 다름없다. 공부하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좀 쉴라치면 ‘그럴 시간이 어딨냐!’는 잔소리가 날아온다. 

 라파엘은 이와 같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라고 했다.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왜 학교의 엄격한 질서에 순응하고 직장을 찾아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말이다.       

 왜 엄마들은 아이들의 공부에 목매달아 할까? 성공의 길을 공부로만 결부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돌아본다.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앞쪽에서 달렸으나 5학년이 되면서 수포자가 되고 사회 과목 또한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러함에도 부모님의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없었다. 저학년까지는 잘했으니 그러려니 생각하신 것 같다. 고학년이 되면서 아버지께서 아프셨고 입원 끝에 결국엔 돌아가셨다. 그러니 고학년 때는 내 공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셨다. 본래, 공부에 관심이 없으셨을 수도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어머니는 질적인 배움을 받아보신 적이 없기도 하셨으리라. 스스로 알아서 잘 할 거라 믿으셨을 뿐. 

 공부다운 공부를 해 본 적 없이 성인이 되었다. 많은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 흥미롭게 읽은 인문학 서적들이 좀 있긴 했지만 세상을 알기에는 부족한 분량이었다. 따라서 지혜가 짧았다. 세상을 보는 눈도 좁았고 겁도 많았다. 또한 자존감이 무척 낮았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지나 온 삶에 불만만 가득한 채로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신념인지 욕심인지가 가득했다. 나처럼 살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가득했다. 나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 불완전함이 창피했고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완벽하려고 노력했다. 밖에서는 지적인 척, 지혜로운 척, 온화한 척 살았다. 안에서는 오랜 세월 축적 되어 온 불만족을 아이들에게 풀어냈다. 

 아이들은 나와 같이 살면 안 되었고 나와 같이 실수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가난하면 안 되고 나처럼 사교성이 없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남의 눈에 밉보이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더 뛰어 나야하고 더 가능성이 있어보여야 했다. 그래서 다그쳤다. 내 불완전한 인생을 반전시켜 줄 수 있는 건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잔소리를 키웠다. 

 아이가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부모의 마음이다. 또는 잘 나가는 부모라면 나처럼 살기를 바라는 기대 또한 부모의 마음이다. 내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그 행복을 우리나라는 누구나 하는 공부를 해서 입신출세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경향이 유행처럼 퍼져있다. 요즘은 많이들 깨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학원에서 괴로워한다. 우리 부모세대까지는 공부만 잘 하면 출세가 쉬웠다. 나도 한 때 그러한 생각이 있었으나 어느 순간 바뀌었다.      

 아이만 바라보면 부족한 면이 보여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나의 부족한 면을 닮을까봐 걱정이 앞선다.      

 “그렇게 텔레비전만 보면 뭐가 되겠니?”

 “자기 물건도 제대로 간수를 못하는데 어른이 돼서는 하겠어? 책임감은 지금부터 기르는 거야.”

 “공부를 해야 커서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적어 놓고서 뜨끔하다. 나는 잔소리가 심한 편이었다. 지금도 그 버릇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지만 그럴 때 일수록 나를 본다.

 ‘애들 모습 보니 또 네가 보여 불안한 거지? 너나 잘해!’ 

 그렇다. 내 자신이 만족스러우면 불안은 걷힌다. 내가 살아 본 세상만큼 불안이 걷힌다. 내가 나를 계발시키며 살아보니 아이들도 이리 살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면 아이들의 삶도 행복할 거라는 근거 있는 믿음이 생긴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뇌에는 ‘거울 뉴런’라는 것이 있다.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아이를 보는 엄마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찡그려진다. 내 마음이 아프면 아이도 아픈 것 같다. 아이의 마음이 아프면 엄마인 나의 마음도 무척 아파진다. 이렇게 내 마음이 상대의 마음이고 상대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만족스러운 모습은 내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 얻어진다. 엄마인 나를 성장시키는 일은 잔소리를 줄이는 일이다. 부모의 성공은 아이가 성공한 사람으로 장성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불안한 내 인생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엄마가 먼저 가치 있는 일로 성장해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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