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연말의 거리엔 캐롤이 넘쳐났다. 대학교 1학년 겨울, 과동기인 나와 p와 j는 다 애인이 없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싶었다. 대학을 1년 다녔어도 고딩 티를 못 벗은 애송이들이었다. 우리는 제일 번화가인 서면에서 만났다. 아마도 피자헛에 갔고, 아마도 스티커 사진을 찍고, 아마도 룸카페에 갔다. 지금으로 치자면 마라탕에 준하는, 인생네컷에 준하는, 스타벅스에 준하는 곳들이었다. 부산에서 화이트크리스마스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추웠다. 셋이서 팔짱을 끼고 롯데백화점에서 쥬디스태화까지 걸었다. 남들이 보기엔 스크럼일 수 있었겠다. 일부러 걸은 그 길엔 캐롤이 넘쳤다. 겨울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산타를 믿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선물도 기억이 안 난다. 남편은 그때 그 선물이 어제 받은 것처럼 생생하다는데. 아무리 부풀려 포장했어도 조그마했을 양말 선물이다. 산타가 전달해 주었단다. 산타는 그 작고 소중한 선물을 보고 "올해는 착한 일을 안 했나 보네. 내년엔 착하게 살거라"하며 남편한테 주었다고. 38살이 되어도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 지금 생각하면 분노. 굳이 그런 본전도 못 찾을 덕담 혹은 악담을 해준 산타의 마음을 헤아려보자면. 노는 날 학원 원장 같은 권력에 의해 차출된 저보수 아르바이트생은 아녔을는지. 노동자의 마음으로 토닥여본다.
회사를 다니면서 크리스마스는 그저 일하는 날이었다. 박이 터지게 힙한 레스토랑의 크리스마스 디너코스를 예약해도 일하는 여친 때문에 먹지를 못하는 불쌍했던 구구남친. 핸드폰만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이제나 저제나 마치나 부장 책상만 바라보던 신입사원이었던 나. 그래서였나. 운명이었나. 구구남친과 빠이빠이 하고 만난 구남친 현남편과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달랐다. 많이 기다릴 바엔 차라리 홈파티를 열어주겠다던, 스테이크를 구워 레스팅 하던, 그 레스팅은 오래 해도 상관없다던, 마음 놓고 천천히 오라던, 그의 대인배스런 마음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실상은 핫플을 예약하지 못한 구남친의 대안이었을래나. 뭣이 중하것노. 내 마음은 레스팅에 인터레스팅 된 것을.
그리하여 당도한 오늘의 크리스마스. 산타를 알게 된 아기가 한 명 있는 우리 집의 올해 크리스마스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나만 즐거웠던 크리스마스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오로지 너만을 즐겁게 하기 위한 크리스마스가 됐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아기 몰래 선물을 전달해 달라고 했고 우리는 아기가 잠든 늦은 밤 몰래 포장했다. 산타가 나오는 동화책을 읽어주며 "오늘 어린이집에 산타 할아버지가 올 거야. 00 이는 무슨 선물이 받고 싶을까나"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케이크. 바나나. 참으로 명료하고 단순하구나. 애미는 로보카폴리 4종세트를 선물로 사놨단 말이다. (ㅋㅋㅋ) 어린이집에선 부모들도 다 같이 산타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준비해 뒀다. 영하 7도의 빌딩풍 칼바람에도 꿋꿋이, 애미와 애비가 당도한 포토존. 아기는 심드렁한데 우리만 신났다. 덜덜 떠는 산타 청년에 위로를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어본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