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월이 너무 바빴다. 주말마다 일이 있었다. 11월 초 사촌동생 결혼식을 시작으로 12월 31일 마지막날까지 일이 있다. 눈이랑 코랑 뜰 새가 없다. 약속을 잡자고 연락 오는 이에게 나는 토요일마다 똥글뱅이가 쳐진 달력 사진을 보내주며 '미안해 ㅠㅠ' 읍소했다. 흡사 '효리 스케줄'을 소화하며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사촌동생 결혼식이 뭐 그리 바쁜 일이냐며 되물을 수도 있겠다. 11월 초엔 사촌동생, 12월 초엔 친동생이 결혼했다. 두 결혼식 모두 서울에서 열렸다. 두 결혼식 모두 아기가 화동을 했다. 두 결혼식 모두 하루 이틀밤을 자고 왔다. 아기를 데리고 부산에서 혼자 KTX를 타고 오갔다. 화동 연습부터 화동 옷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자고 와야 하니 준 여행에 가까운 짐이 있었다. 최측근으로서의 결혼식 참석은 거의 내가 결혼하는 수준으로 힘들었다. 나 좀 살려줘. ㅋㅋㅋ 다른 주말은 연말 모임으로 토요일마다 일이 있었다. 난 토요일만 쉰다. 그러니까 주말 쉬는 타임도 없이 내내 달려버린 연말이었다.
정신이 없다는 말을 이리 장황하게 읊으면서도 웃는다. 19일은 당직근무였다. 평소보다 늦게 퇴근을 하는데 아기는 아파서 어린이집을 못 갔다. 대신 봐주는 엄마가 욕보셨다. 낮잠을 안 잤단다. 아기는 낮잠을 자지 않으면 정말 저세상 짜증을 부린다.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불고 마 다했으. 마침 남편이 집에 올 수 있다고 해서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주말부부다. 아기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그치고 잠이 들었다. 한바탕 치르고 나니 밤 10시. 얼굴 씻을 힘도 없었다. 남편도 그래 보였다. 오랜만에 침대에 같이 누웠다. 놀라지 마세요. 아무 일도 안 생겨요. 자자. 일단 자자.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소리쳤다.
오늘 결혼기념일이다!!!
달력을 보는데 19일라는 숫자가 괜히 신경이 쓰이더라니. 컴퓨터 하단의 2023-12-19가 왠지 익숙하더라니. 19일 뭐였지. 당직이라 그런가. 뭐지. 절친 생일 18일인데. 19일 뭐가 있었나. 하면서 보낸 나날들이 스쳐갔다. 그 12월 19일은 내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던 나머지 남편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아하하하 침 나오게 웃어버렸다. 그 와중에 남편은 본인이 떠올려서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먼저 기억해 냈으면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 텐데 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진짜 너무 크게 아하하하 웃어버렸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일을 하고 돌아온 나에게 정성의 크림파스타를 내어준 남편을 보고 "결혼 잘했다"라고 울던 새댁 소디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부부에게 생일보다 더 중요한 결혼기념일을 까먹는 줌마 소디는 무어란 말인가.
부랴부랴 샤인머스캣과 똥글치즈를 듬성듬성 담고 먹태와 쥐포를 굽는다. 똥글치즈에 굴러다니는 알파벳 초를 끼워본다. H가 제일 낫나. HAPPY 앤 HOONY 앤 HONEYMOON을 다 따왔다고 당당히 외쳐본다. 남편에게 말한다. 그래도 잘 기억했네. 그가 답한다. 사실 "우와, 결혼기념일 얼마 안 남았네라고 말하려 했는데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더라. ㅋㅋㅋ" 그래도 맥주를 짠.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1시간 반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