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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윤 Oct 15. 2019

한국 근대 여성 음악가 임배세

3.1 운동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2019년, 3.1 운동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하여,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바로, 한국 근대 여성 음악가 임배세(林培世, 1897-1999)와 나의 인연이다.


임배세가 누구야?


임배세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한국 근대음악 자료를 보다가 '임배세'라는 이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20세기 초에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여성이며, 소프라노로 활동했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금주가(禁酒歌)'의 작사•작곡가였는데, 이 모든 사실이 나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 시기에 여성이 작사, 작곡을 했다고?! 게다가 금주가는 찬송가로 널리 불렸다니.


임배세 (사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는데, 임배세는 녹음된 목소리도 없고, 그래서인지 이름도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 홍난파가 성역을 구분하면서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임배세의 목소리"라고 얘기했을 만큼 그녀는 당대 조선에서는 누구나 아는 유명한 성악가였다. 그래서 나는 임배세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커졌고, 연구에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느꼈다.


'남이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딱 이 다섯 개의 키워드가 임배세에 대해 내가 가진 유일한 단서였다. 그리 찾아 헤매었지만, 딱히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한국 근대음악 연구에서 임배세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정보가 거의 없는 걸로 봐서 아마도 연구가 시도조차 되지 않았던 듯했다. 아니면, 시도는 있었는데 성공하지 못했거나.


임배세에 대한 생몰연도도 정확하지 않고 그나마 몇 안 되는 활동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서 밑그림을 그리고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남이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출발점이지, 그 당시는 얼마나 막막했었는지 모른다. 자료를 뒤지다가 허탕 치기 일쑤이고, 그냥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많다. '더 시간 낭비하기 전에 포기할까, 아니 포기해야 하나'. 그 생각을 왜 안 했으리오. 하지만 그때마다 계속 연구자로서 오기가 발동하는 것이다.


자료를 찾으며 연구 방법과 방향을 고민하며 보낸 세월 때문에 애증의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 깊은 속마음은 진짜 포기하기 싫으면서도, 현실의 벽에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다시 연구할 힘이 생길 때까지 무작정 덮어놓고 숨을 고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다섯 개의 키워드를 점차 극복해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부딪힌 또 다른 문제는 '카더라'였다. 어디서 인용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황무지에서 한줄기 빛처럼 한 줄의 정보가 나타난 것은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무지 반가운데, 관련 단어 혹은 한 줄의 정보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아서 그 출처를 모조리 확인해야만 했다.


잉크가 날아가 글씨가 뭉개져 가고 있는 100년 전 신문, 잡지 등 기록 인쇄물들을 바탕으로, 임배세의 행적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또다시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만 명확해져도 일주일 내내 기분이 좋았던 시간을 지나서, 아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던 임배세라는 인물은 점점 그 행적과 기록이 퍼즐처럼 맞추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삶과 활동에 대해 조금씩 밝혀낼 수 있었다.



임배세는 누구?


임배세는 일단 본명이 아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Bessie', '빼시', '뱃시'로 불리던 그녀의 본명은 '임을선'이며, 서울 출생이라고 알려진 바와 다르게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을 졸업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소프라노로 활동했고, 앨리스 아펜젤러와 함께 정동교회의 성만찬위원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신앙심 두터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의 교사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이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갔지만, 최종적으로는 일리노이 웨슬리언 대학(Illinois Wesleyan University)에서 종교 교육으로 학사학위를 마쳤다. 전공은 음악에서 바뀌었지만 기독교와 한인 사회를 위해서 소프라노로서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랐는데, 그녀에게는 늘 '음악'과 '신앙'이 자신이 속한 교회와 사회에서의 활동 기반이었다.


임배세는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업가 남편 김경과 함께 독립금을 꾸준하게 지원했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을 때,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위로가 담긴 메모도 전해진다.(독립기념관 소장, 자세한 내용은 논문 참조) 


한국 근대 여성 음악가와 독립운동이라니!


해방 이후 한미재단에서 일하기도 했던 임배세는 남편 김경과 사별 후, 90세 가까운 나이까지 뉴욕에 있는 롱 아일랜드 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다. 평생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임배세는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음악인이 활동하게 되기 전에 성악, 작곡, 음악교육 등 다재다능함을 발휘했던 한국 근대 음악가였다. 특히 그녀는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환원에 대해 늘 생각하고 몸소 실천하려 했는데, 내가 논문 제목에서 주저함 없이 소프라노가 아닌 '음악가'라고 넓게 표현한 이유도, 그녀의 활동이 노래하는 소프라노에만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게도 연구 중에 임배세의 가족분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몇 장의 가족 소장의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성과는 지금까지 임배세의 유일한 곡으로 알려진 <금주가>(1918년) 외에도 <나의 성경>(1938년, 추정)이라는 곡을 발굴하여 한 편의 논문과 함께 세상에 소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약하나마 역사의 씨실과 날실에 작은 한 올을 채웠다는 보람도 느끼면서.


연구에 큰 힘을 실어주신 임배세의 가족분들이 올봄 초대해주신 음악회에 다녀왔다. 그리고 여든이 넘으신 임배세의 조카분을 비롯한 여러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임배세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 남동생의 가족들이 가장 가까운 혈육이다.


"우리 고모님을 연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분을 연구할 생각을 했나요?"


질문을 받자마자 그동안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연구자로서 발동한 오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임배세의 삶이 하나하나 드러날수록 정말이지 내가 눈물 나게 가슴 뜨거워진 적이 많았던 것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감동 속에서 계속 연구할 수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 힘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시간.


임배세는 자신이 선택하는 매 순간 모든 일에 확고한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임배세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자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여성 독립유공자는 3%가 채 되지 않고, 여전히 그들에 대한 발굴과 평가가 부족하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무겁지만, 임배세의 음악활동 외의 다른 활동 역시도 곧 따뜻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논문,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음악가 임배세(林培世, 1897-1999): 노래로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다" (<音.樂.學> 통권 35(2018), 한국음악학학회)


**국제음악원전기구(RISM, Répertoire International des Sources Musicales)에서 소개된 임배세 관련 기사. (영어)

https://rism.info/rediscovered/2019/04/18/bessie-lim-the-first-woman-musician-of-korea-and.html


***국제음악원전기구의 공식 페이스북에 소개

https://m.facebook.com/RISM.info/posts/2783356765038483


****임배세 발굴에 주목한 독일의 '여성과 음악 아카이브'(Archiv Frau und Musik)

https://www.archiv-frau-musik.de/archives/sammelthread-news-ix



2020년, 3•1절 101주년을 맞이하여 임배세 선생님께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2월 29일, 큰 기쁨으로 이 내용을 추가합니다.)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https://www.mpva.go.kr/mpva/news/reportView.do?id=45515&notice=N


*이대학보 기사

http://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3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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