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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May 01. 2024

순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순한 마음씨와 말씨를 가진 시설주무관님

좋은 사람을 보면 마음속 공기가 따뜻해지고 눈가에 웃음 주름이 자글거리고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좋은 사람과 근무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운인지 모른다.


나는 매일 아침 아이들 아침 맞이를 하며 화단의 꽃과 나무를 살핀다. 3월 초 빈 화단에 서둘러 돋아나는 새순들이 봄의 전령이 되어 인사할 때면, 나는 그렇게 반갑고 고맙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 맞이만큼 화단의 꽃과 들풀, 나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하루를 기쁘게 시작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풀들의 생명력은 견줄 데가 없다. 봄비가 내린 후라면 겨우 하루 지났거늘, 키가 쑥 자라 있다. 나에게는 이름 있는 꽃이든, 이름 없는 들풀이든, 똑같이 활기찬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4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화단의 풀들이 고민이 되었다.


평생 농업연구소에서 일하시다 퇴직하신 남편을 둔 교감선생님은 "교장선생님, 이 풀은 뽑아야 해요. 꽃들이 못 자라게 해요. 남편은 길 가다가도 이 풀을 보면 멈춰 서서 뽑아요" 하시며 작은 보라색 꽃이 귀엽게 핀 풀을 잽싸게 뽑아내기도 했다. 이 풀의 성장 속도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사월 중순을 지나면서는 웃자라 다른 꽃들과 식물들을 뒤덮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보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식물들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대로 서로 엉키고 설키며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학교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교육 공간이기에 관리가 필요하다. 조경을 고려해서 심은 나무들이 잘 자라게 신경 써야 하고, 벌레가 꼬여드는 것도 막아야 한다.






학교에는 시설을 관리하는 주무관이 한 분 계시다. 혼자서 학교 안팎의 시설, 화단, 수목을 관리하려면 일이 많다. 그러니 학교장이 보기에 급하다고 무턱대고 일을 주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번은 행정실장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현관 옆 화단의 산홍이 잡풀들에 뒤덮여 맥을 못 추고 있다고 지나는 길에 슬쩍 말했다. 월요일 출근했더니 잡풀이 말끔히 정리되어 영산홍이 분홍분홍 환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행정실에 들러 시설주무관님께 "현관 옆 화단이 깔끔해졌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주무관님은 "아닙니다. 제가 조금씩 조금씩 화단 관리 하겠습니다" 하며 순한 미소를 보내셨다.


사람에게는 청개구리 기질이 조금씩 있다. 나의 경우는 무슨 심술인지 남이 시키는 일은 일단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온다. 내 마음에서 출발한 일은 시키지 않아도 열정으로 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내 안에 못된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다. 세월을 살면서, 시키는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면서는 '그러려니' 넘어가고 순응하기도 하지만 '시키는 일은 왠지 하기 싫은 사람의 심리'를 잘 알기에 시설주무관님과 같은 순둥한 분을 보면 순한 기운에 기분이 좋아진다.


새 잎이 돋아나지 않는 마른 나뭇가지들도 보기 흉했다. 푸른 나뭇잎들과 대조되어 마른 가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생명을 다한 가지들은 정리해 주어야 살아있는 가지들이 잘 자란다. 5월 2일에 운동회도 예정되어 있고 겸사겸사 시설주무관님께 제초 작업과 마른 가지 전정 작업이 필요함을 말씀드렸다.


"주무관님 어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살 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이쿠, 괜찮습니다. 교장선생님."

"한 번에 다 하려 마시고, 조금씩 조금씩 하시면 됩니다. 무리하면 건강에 안 좋아요."

"아닙니다. 일하려고 체력 비축 많이 했습니다." 시설 주무관님은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일하다 보면 그게 안되잖아요." 실장님이 옆에서 거드셨다.

"맞아요. 그래도 안에 일 보시다가 좀 움직여야겠다 싶으면 나가셔서 오늘은 여기, 내일은 어디, 이렇게 조금씩 하십시오. 이제부터 풀과의 전쟁일 것 같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주무관님 평안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웃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마른 가지가 정리되니 한결 산뜻해진 느낌이었다.


겨우내 묵혀둔 수도시설에 흙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어서 청소가 필요하다고 미안해하며 말했을 때도 주무관님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 부탁할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했다. 싫은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일을 주문하는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는 분이시다.


며칠 전에는 실장님이 시설주무관님이 학교를 둘러보다가 2층에 7년 전 학교를 이전하면서 사용했던 공사 물품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알려주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업체를 불러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저번에는 학교 시설 대장에 오류가 많다며 시간 외 근무를 자청하여 정리를 하였다.


사람이 전부다. 사람에 따라 공간의 모습이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주변 사람의 모습도 달라진다. 다시 오지 않을 하루, 고유한 선물 같은 시간을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순한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싶은 날이다.



마른 가지를 정리하시는 시설 주무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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