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5학년 남자아이들은 축구에 진심이다. 점심 쉬는 시간 운동장은 그들의 차지다. 가끔 몇몇 4학년 남자아이들이끼기도 하는데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 같다. 운동장이 조금만 더 넓었어도 한쪽 구석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산 허리로 학교를 이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5학년 남자아이들이 으레 운동장을 차지하니 4학년들은 학교 건물과 화단 사이 보도블록 공간에서 아쉬운 대로 공을 차며놀았다.
처음 이 아이를 봤을 때 여자 아이인 줄 알았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하나로 묶은 모습이 영락없는 여자 아이였다. 운동장을 누비며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남자아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침 맞이할 때 보면 축구공을 발로 차며 등교한다. 찻길에 공이 튈까 봐 주의를 주면 못 이긴 척 손에 들기도 하지만 다음 날 보면 또 발로 공을 굴리며 학교에 온다.
점심 쉬는 시간 삼사십 분은 모두 함께 축구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긴 머리 소년이 날마다 차며 등교하는 그 공이 유일무이한 축구공이다.한 학기가 지나고 축구공을 보니 더 너덜너덜해졌다. 봄 여름 동안 그런대로 봐줄만했는데 말이다.
낡은 축구공을 품에 안고 등교하는 모습이 내 마음에 머물렀다. 그리고 1학기 어느 날 교장실을 찾아왔던 남자아이 두 명에 대한 미안함도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과 후 축구하러 운동장에 나왔는데 축구공이 없다며 교장실에 왔었다.
"교장선생님. 운동장에 축구공 못 봤어요?"
아이들 따라 운동장으로 나갔다. 축구공은 보이지 않았다.
"교무실에 가서 축구공 하나만 빌려달라고 말해. 교장선생님이 그랬다고 전하고."
그러고는 뒤를 살피지도 않은 채 내 할 일을 하느라 깜박 잊고 그날이 지나버렸다. 다음 날 오전에 교감선생님이 아이들이 축구공 빌리러 왔던데 체육관에 열쇠 채워져 있어서 안된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어제 일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실망한 얼굴이 떠오르고 무심했던 내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연일 폭염이라 운동장도 조용했다.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점심시간 운동장은 여전히 뜨거웠고 운동장은 심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주에는 바람이 잠시 놀다가기도 하더니 점심시간은 다시 축구하는 아이들로 활기를 찾았다. 아이들이 차는 축구공은 성한 곳 없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래도 바람을 잘 넣어서 탱탱했다. 나는 마음에 간직했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장으로 나가는 현관 신발장 두 칸을 자율 축구공 보관함으로 만들고 싶다고 교감선생님, 교무부장님께 말했다.
"우리 아이들 저렇게 축구를 좋아하는데요, 새 축구공 두 개만 꺼내서 신발장에 넣어두면 어떨까요? 자유롭게 꺼내 사용하고 쓰고 나면 이곳에 보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5교시 시작 준비종이 울렸다. 축구하던 아이들이 땀에 흠뻑 젖은 채 현관으로 들어왔다. 나는 자율 축구공 보관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들아, 여기 축구공 넣어 두었으니 언제든지 사용하면 돼. 쓰고 난 뒤에는 잘 넣어두고, 알았지."
그리고 긴 머리 소년에게도 이제 축구공 매일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서운하려나' 생각했는데 씩씩하게 "예!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길래 안심했다.
학교의 물건을 잘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유용하게, 아이들을 위해서 쓰이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