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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nzan Sep 14. 2020

아이 없는 삶

정답이 없는,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를 뿐.






"결혼 정말 축하해요, 근데 혹시... 바로 애를 가질 생각인가요?"


결혼식 2달 전, 대표실에 들어가 대표님께 청첩장을 건넸다. 이후 돌아온 대답이었다. 저는 딩크족이고,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고 말씀드리자 그제야 본론을 이야기했다.


"방대리, 나이가 29이지? 지금 바로 애를 가져서, 낳고 돌아온다 해도 그 공백 기간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 충원을 해야 하고,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방대리 보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린 사람을 고용할 거예요. 다시 돌아온다 해도 내가 방대리랑 일을 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해"


그렇다. 나의 현실.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해줘서 더 고마울 지경이었다.


우선 나의 생각을 천천히 말씀드렸다.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하며, 경력단절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제 발로 걸어 나가기 전까진 악착같이 일할 생각이라는 농담까지 더해가며, 아무렇지 않게 대표실을 나왔다.


앞으로 나는 "아이는?"이라는 질문 앞에 얼마나 많은 감정 소모를 할지, 남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삶'의 잣대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을지 앞이 깜깜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내게 결혼은 선택이라고,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알려줬는데 출산은 아니었나 보다. 결혼 이후 내가 선택한 아이 없는 삶에 대해 많이 아쉬우셨는지 내가 어릴 때 즐겨 읽던 책들을 버리지 못했고, 신혼집을 보며 아이가 걸어 다니기 참 좋은 구조라며 넌지시 건네곤 하셨다.


고등학교, 대학교, 취준, 결혼 그 모든 선택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책임도, 후회도 온전히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나의 선택으로 지켜온 내 인생이었는데 왜 출산은 선택 전 충분한 고민도 없이 결혼과 동일시되어 당연히 내가 이뤄야만 하는 숙제가 된 것일까. 비출산 또한 나의 선택이며, 존중받아 마땅하다. 아이를 낳기로 한 결정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도 그 모두 신중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데도 아이 없는 행복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들어야 했던 수많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불필요한 죄책감들이 나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1.

딩크 부부는 '노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외로울 것이다'라는 사람들이 있다.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자식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라며 무거운 짐을 짊어주고 싶지 않다. 또한 내 자식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독립을 할 테고 그런 자식들이 부모를 외롭지 않게 할까? 물론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몰라 혼자 말하고, 추측하며 보내는 시간들은 외롭지 않을까.(각자의 삶에는 각기 다른 외로움의 무게는 늘 존재하니까.)


중요한 건 아이는 부모의 외로움을 달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



#2.

딩크 부부는 '애가 없으니 이혼이 쉽다'라는 사람들이 있다. 황혼이혼이란 말은 왜 생겨났을까. 결혼의 목적은 출산이 아니라, 사랑하는 반려자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지난해 11만 1천여 건의 이혼이 이뤄졌으며 이혼 가정 중에는 20년 이상 산 부부의 비율이 38.4%로 신혼부부인 4년 이하 부부의 이혼율보다 15.1% 포인트 높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봤다.


유독 딩크 부부에게만 이혼이 쉬울 것이다라는 편견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3.

'여자에게 문제가 있을 거야'라는 궁금증으로 질문을 건넬 사람들을 위해 남편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바로 다음날 정관수술을 감행했다. 부모님과의 깊은 상의는 없었다. 통보였다. 사전에 여러 번 이야기해뒀던 상황이라 바로 받아들이셨고, 우리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양가 부모님의 답변으로 우리가 행한 행동에 더 힘이 실렸다. 그 점에 있어 너무 감사하다. 남편에게도.



말하고 싶은 건 그대들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만큼이나 신중히 고민을 했다는 점이다. 나는 우리 부부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질문들에 다양하게 답변을 해보았다. "국가의 문제를 홀로 감당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마주하기 싫은 이 현실을 어찌 핏덩어리에게 이겨내며 살아가라 강요할 수 있을까요" 또는 "경력단절은 생각할 수 없어요. 살아있는 느낌을 충만히 느끼며 살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류의 말들은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더더욱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말이다.


 '딩크'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맞닥뜨려지는 불편한 상황들 앞에 다투기 싫은 나만의 처세법들이 나날이 갱신 중이지만 실례를 범하는 질문들이 아니라면 상냥히 답할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 꼴이라 어느 순간 관련된 이야기를 회피하게 된다. 우선 나와 다른 생각이라고 해서 굳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게 결론이었다. 여전히 내 속엔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위대하며, 그들의 책임감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가 상처 받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소중한 주변인들의 이모로써 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 생각 강요하지 말기.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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