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이 내는 큰 소리가 싫다. 누군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게다가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정신이 혼미해져 위축되어 버린다. 흔하디 흔한 얘기지만 어린이, 청소년 시절 화가 난 양육자가 소리 지르는 것을 방에 누워 자는 척하면서 듣고 있어야 했던 경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3~4살 때 이모를 따라 간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을 보고 저 아저씨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싫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느 정도는 가지고 태어난 성향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양육자 때문에 악화된 것은 있지 않았겠나. 사람이 나이 들어서까지 부모 탓을 하면 무책임해 보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큰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남이 소리 지르는 것만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웬만하면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화난 모습, 감정적으로 격앙된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살면서 몸싸움을 한 적은 당연히 없고 말싸움을 한 횟수도 손에 꼽을 수 있다. 그래도 연애를 할 때는 상대가 안전하다고 느끼는지 말싸움을 한 적이 많이 있지만, 연애 상황을 제외하면 싸운 것이 열 번은 될까 모르겠다. 언성이 높아진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소리를 지른 것은 더 적을 것이다. 그런 나도 어렵지 않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만난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지만 오랫동안 존경해 온 선생님이 있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아마도 3학년 때 영어 수업을 담당하셨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원래 영어 과목을 매우 좋아하는 데다가 젊고 예쁘고 성격까지 좋은 선생님이 수업을 해 주시니 영어 수업이 너무 좋았다. 공부를 잘하긴 했어도 모든 선생님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내가 그 영어 수업 시간에는 맨 앞줄 가운데 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수업에 꽤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반 친구들 마음도 내 마음 같지는 않았는지 대부분의 친구들은 영어 수업을 듣는 대신 짝과 떠드는 것을 택했다. 어떤 때는 그 떠드는 소리가 너무 커서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신기한 것은 선생님이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다는 점이었다. 그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떠드는 학생들을 제재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너무 시끄러워졌다 싶을 때 한 번쯤 주의를 주고 다시 수업을 하는 정도 아니었을까.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아마 고등학생인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왜 이렇게 착하시지? 화를 내야 애들이 말을 들을 텐데.'
그건 내가 교사가 된 첫 해에 열어본 교원평가 서술형 문항 답변에서 가장 많이 보인 내용이기도 했다. '선생님, 너무 착하세요.' '애들한테 화 좀 내세요.' 등의 말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교원평가 서술형 문항에 답하는 대신 영어 선생님에게 그걸 직접 물어보았다. 영어 선생님이 무슨 대회엔가 참가하는 나를 차에 태워준 날이었는데, 뒷좌석에 앉아 운전하는 선생님에게 애들이 시끄러운데 왜 화를 내지 않으시냐고, 왜 소리를 지르지 않으시냐고 물어봤다. 당시에는 체벌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고 나 역시 감정을 배제하고 사랑의 매를 사용하는 선생님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나의 경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는데 15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에 때때로 좌절한다.) 그런 내게 학생들이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소란스럽게 구는데도 소리조차 지르지 않는 선생님은 너무 낯선 존재였을 것이다. 그날 선생님은 내가 그 후로 오래오래 잊지 못할 답변을 해 주셨다.
"나는 왜 다른 선생님들이 애들에게는 소리를 지르는지 이해가 안 돼. 예를 들어, 내가 교무실에 있을 때 선생님들이 시끄럽다고 해서 소리를 지르지는 않잖아. 그런데 왜 애들한테는 그걸 해도 된다고 생각할까?"
학생인권이나 청소년인권을 다룬 책을 읽고 그걸로 토론을 한 것은 대학교 때였지만, 그 시작은 아마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저 말을 들었을 때가 아닐까 나는 늘 생각했다. 나는 소리 지르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무서워하는 사람인데도 교사는 학생에게 그래도 된다고, 나아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선생님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료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소리 지르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면, 학생이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소리 지르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라는 명제는 너무나 간단했다. 나는 그 명제가 좋았고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그 명제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런 교사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사람인데도 학생들에게는 자꾸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이 복도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창문에 올라가 있을 때, 수업 시간에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 소란스러워질 때, 교실에 있는 다른 학생에게 무례한 말을 할 때 혹은 교실에 없는 다른 학생에게 무례한 말을 할 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만 댈 때, 하지 말라고 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할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학생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 말과 행동을 멈췄고 교실의 분위기는 정돈되는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때 싫어했던 선생님이 있다. 인상이 무척 좋은 데다가 평소에는 성격도 꽤 좋아 보이는데 화가 나면 학생들을 폭행했다. 한 친구가 교실에 늦게 들어왔단 이유로 그 친구의 코를 잡은 채 앞문에 몇 번이나 그 친구를 밀쳤던 기억은 너무 강렬해서, 그 친구가 누군지 잊은 지금도 그 장면만은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에는 학생들을 실외에 세워 뒀고, 한 명만 잘못해도 다 같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가 아무리 평소에 밝은 웃음으로 나를 대해도 나는 그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사랑의 매'를 사용해 때리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며 학생들에게 분풀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우리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과 행동을 멈췄고 교실의 분위기는 정돈되는 것처럼 보였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이 싫었다. 고등학교 때 싫어했던 그 선생님의 모습이 겹쳐졌다. 상담 선생님을 만나 이런 얘기를 하면 충분히 화날 상황이었고 필요할 때는 화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았다. 나는 화가 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나는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른 이유는, 그냥 학생들에게는 소리를 질러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내가 소리를 질러도 나를 위협하지 못하는 만만한 사람이니까.
나는 아직도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그런 내 모습을 싫어하고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도 얼마 안 가 또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을 대하는 내 모습에서 나를 공포스럽게 했던 양육자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내가 정말 싫어했던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과장을 조금 보태 말하자면 절망스럽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소리를 질러서라도 통제해야 하는(정확히는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은 자주 생길 것이다. 내가 사랑한 단순한 명제와 현실에서의 내 모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