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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봄 Jan 31. 2023

그냥 퇴사, 별거 아니네.

명문대와 대기업을 다니다 돌연 술집 차린다고 뛰쳐나온 여자 사람 이야기

여느 날과 같이 8시에 출근해서 업무용 PC를 켜고 사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대화 상대에서 팀장님을 검색하고 대화창을 열었다. 그리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팀장님, 면담 신청합니다.'라고 메시지를 쓰고 엔터키를 냅다 눌렀다.



    나 : 팀장님 퇴사하겠습니다.

    그 : 더 좋은 곳으로 가니?

    나 : 아니요.

    그 : 사업하려고?

    나 : 아니요.

    그 : 그러면 왜 퇴사하나?

    나 : 그냥요. 재미가 없어서요.

    그 : ???

    나 : 계획은 없어요. 1년 쉬면서 생각해 보려고요.

    그 : ??????



1시간 30분의 길고 긴 면담이 끝났다. 1주일의 유예기간을 선고받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물었다. “왜 퇴사하는 거야?”, “어디 이직해?”, ”퇴사 이후 계획은?”, “준비된 건 있어?”, “대안은 마련하고 퇴사해야 하지 않아?”.


사실 퇴사 이후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위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모범적인 답안이 있어야만 하는 압박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퇴사한다고 이미 질렀는데 '다시 번복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휩싸일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내가 혹시 미친 건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하다 못해 나를 뒤덮기도 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유예기간 동안 다시 마음을 다잡고자 회사 일에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이미 떠난 마음을 다시 잡는다는 건 지옥이었다. 마치 맘이 떠난 남자친구를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떤 일이 나와 잘 맞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방황을 많이 했다. 업무도 바꿔보고, 팀도 바꿔보면서 나름 아등바등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래서 이미 회사 내에서는 내가 만족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진짜 퇴사하려는 이유는 뭘까? 


예전에 한 임원이 나를 따로 불러 한 이야기가 있다. “일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일은 그냥 하는 겁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저 멀리 경상도에서 서울 상경을 선택한 내가 처음 들었던 말이다. 그것도 내가 모시는 직속 상사에게서 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일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 일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재밌으면 삶이 행복하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지금 하는 일이 재밌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시간의 반 이상을 투자하는 일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야 말로 진짜 퇴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들이 쉽게 퇴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독립일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퇴사는 준비된 퇴사라고 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퇴사 준비를 병행하고, 때가 되면 나가는 것이다. 요즘 말로 파이프라인을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 또한 고민이 많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퇴사해도 괜찮을지.


그러나 사람의 성향이 제 각각 이듯 나는 일단 퇴사부터 하고 생각하고 싶었다. 멀티가 잘 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의 일에만 몰두가 가능한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두 가지를 다 하자니 안정성을 택하여 회사에 눌러앉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9년 일했으면 1년간은 모은 돈 좀 까먹으면서 한량처럼 지내도 되지 않겠냐가 내 논리였다. 나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플렉스 해도 괜찮다고 정신 승리를 했다.


그렇게 나는 9년, 3312일을 다닌 나의 첫 회사를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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