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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11. 2024

토론과 언쟁

옳고 그름이 없는 사람차원의 이야기

독서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원: <나는 솔로>에서 직업이 변리사인 여성이 남성들한테 호감을 얻지 못하자 그동안 공부만 하느라 연애를 하지 않은 걸 후회하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성취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남들 하는 건 두루두루 경험해 보는 게 좋구나 싶었어요.     


나: TV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이 받아들일만한 선에서 편집해서 보여주잖아요. 자기 위안과 합리화가 될만한 부분에 맞춰서. 거기에 진실은 없는 것 같아요.     


회원: 아니, 뭐 예능에서 진실을 기대하지는 않죠.     


나: 저는 이십 대 때 배우자는 직업과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생활습관 때문에 다투고, 사고방식이 달라서 벽을 느꼈어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미디어에서 본 걸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였더라고요.

   

그렇다. 나는 한 회원의 말이 틀렸다고 했다. 다른 의견을 말하려던 것이었지만, 하고 나니 비난하는 게 돼버렸다. 독서모임에서 돌아와서도, 그 후 며칠 동안도 그분한테 미안하고, 내가 배려가 부족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되었다. 한편으로 내가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언쟁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탓하면서도 대화를 더 큰 곳으로 끌고 나가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일었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상반된 의견을 듣기 위해서다. 자주 만나는 지인들은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경향이 있고, 서로 불편할만한 얘기는 예의상 피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좀처럼 없다. 하지만 그 불편한 지점에 나의 상처와 피해의식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걸 발견하기 위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언쟁으로 만들어서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결국 내 손해다. 


'토론을 오래 해온 분'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 독서모임에서 반대 의견을 상대를 다치지 않게 말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토론을 오래 해온 분: 의미차원의 말하기가 있고, 사람차원의 말하기가 있는데, 사람 즉 개인의 이야기를 할 때는 넘어가는 것이 좋아요. 자칫하면 공격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거든요. 사람차원의 이야기는 옳고 그른 것이 없어요.     


의미차원과 사람차원의 말하기라.     


이번에 토론한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회고가 담긴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였다. 참전병사의 실명과 전쟁에서 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읽을수록 위대한 전쟁이란 없고, 전쟁에는 개별적인 죽음과 희생만 있을 뿐이라는 걸 느꼈다. 무엇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냥 삶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 '글쎄, 소비에트 정권이 없었다면 이 아빠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가난뱅이로 살았겠지. 부유한 지주 밑에서 노예처럼 살았을 거야. 소비에트 정권은 아빠에게 모든 걸 주었단다. 공부도 하게 해주고. 그래서 아빠가 이렇게 엔지니어가 되어 다리도 건설하는 거잖니. 아빠는 조국에 정말 많은 빚을 졌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316p


사회주의가 일어났을 당시,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하고 이윤을 분배한다는 개념은 타고난 신분에 따라 차별과 착취를 당하던 이들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으로 두 번의 구금을 당했던 희남삼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이여. 젊은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니까 우리가 기성세대가 되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어.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지. 근디 사람이 바뀌더라고. 사람이 바뀔 줄은 몰랐어.”    

 

희남삼촌 같은 수많은 대학생들이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출세길을 버리고 불평등과 착취당하는 이들을 위해 싸웠다. 희남삼촌은 전북대 토목공학과를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토목공학과 교수가 되거나 경제 성장기에 건설사 임원을 했을지 모르는 삼촌은 페이스북에 건설노동자라고 소개하고, 62세가 된 지금도 목수로 살고 있다. 내가 지켜본 삼촌은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그건 청년 시절부터 자신이 가진 신념을 삶과 일치시키는데서 오는 자부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삼촌 이야기를 들으면 사회주의의 이상적인 이론이 왜 현실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지,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째서 몰락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토론을 오래 해온 분'이 추천한 <아주 짧은 소련사>의 서문을 읽고, 이렇게 정리해 봤다. 소련의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계획경제와 정치가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듯 했지만, 점차 사람들의 삶과 맞지 않아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역사는 우리 삶과 마찬가지로 우연하고 자발적인 사건으로 결정되는데, 이것이 소련의 대계획을 틀어지게 했다.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도 이 우연성과 자발성 때문이고, 몰락한 것도 같은 이유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처절한 피해만을 말하지 않았다. 인터뷰했던 이들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고양되는가 하면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리워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우정과 연대, 나보다 다른 이를 걱정하는 마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들. 우리가 풍족한 환경에서도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초반에는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건 의미차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부동산 이야기로 넘어왔다. 윤석열 대통령을 뽑은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내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내 집값이 다른 사람보다 오르지 않아서, 집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집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해서라고 하다가,    

     

나: 아빠가 저한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라고 해서 제가 그랬어요. 어떤 일이든 내가 이득을 보면 손해 보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적극적으로 남한테 손해가 되는 일은 안 하고 싶다고. 집값이 오르면 월세가 올라서 이사 가야 하는 사람이 생길 거잖아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나도 솔직해져야겠다. 아빠는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나한테 유산으로 주겠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아빠 소유의 아파트면 나의 노후는 괜찮겠지 하면서. 내가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하고 연로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저런 소리를 할 수 없다. 사람차원의 이야기에서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건 이런 뜻인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에 사람차원의 이야기를 듣고 반박하면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만다.


생각할수록 내 잘못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단정할수록 진실과 멀어진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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