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지난해 십 년 만에 감격스러운 회합을 하고 자주 볼 줄 알았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일 년 만에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거의 합숙을 하다시피 했던 우리가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렵게 되었다니.
약속 장소는 바로 우리의 서식지 경대북문! 택시에서 밖으로 발을 딛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건널목 건너편에서 벌 두 마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날아가서 우선 추억의 거리를 걸었다. 비까지 촉촉이 내려주어서 감상에 빠지기 안성맞춤이었다.
“야, 너 여기 굴러내려 왔는 데다.”
“암, 그렇고 말고. 여긴 두 발로 걸어오기보다 굴러내려 와야 제맛이지.”
“어묵 파는 포장마차 없어졌네?”
“균 오빠가 너 어묵 하나 먹고 국물 다섯 번 퍼먹는다고 지금도 부끄럽다고 한다니까.”
이십 대의 나에게서 많이 걸어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벌떼로 합체하는 순간 빰빠밤빰, 배경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만화 캐릭터처럼, 어딘가에 완전보존되어 있던 ‘이십 대의 나’가 나타났다. 외모는 아니고, 스피릿만 그렇다는 뜻.
아쉽게도 동동맘은 가족과의 일정 때문에 빠졌지만, 한 달 전에 미리 약속을 한 덕분에 나머지 5명은 모일 수 있었다. 떼로 만나니까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빈틈없는 차단막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하나가 기억 속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나머지가 무섭게 몰두해서 이십 년 전과 똑같은 강도로 폭소에 환호에... 참 철없는 것들.
이번 회차에는 특별 게스트가 있었다. 미의 남편이자 대학선배인 균오빠. 벌떼가 칭하길 나와 앙숙 아니 나와 대적할만한 인물이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나에 반해, 균오빠는 내내 방어를 하다가 폭탄을 하나씩 던지는 토크로 좌중을 초토화시키는 사람이다. 그날도 십 년 만에 만나놓고 어제 만난 사람처럼 다다다다 소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며 잘도 놀았더랬다. 세상에 회사에서는 상무님이라는데 노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하나 적어보려고 했더니 생각이 안 난다. 7시간을 놀아놓고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니. 대신 미와 균 부부와 뜻밖에 2차 만남을 갖게 된 이야기를 해보겠다.
*
그 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났다. 부모님 집이 있는 대구에서 출발하면서 내비게이션에 군산 집 주소를 찍고 경부고속도로에 올랐다. 1 시간 30분쯤 달렸을 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갔더니 거창 톨게이트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거창 시내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또...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작년 추석에도 내비게이션이 거창을 통과하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교통정체가 일어나면 내비게이션이 교통정보를 수신해서 덜 막히는 경로를 안내하는 거라고 나중에 동동맘이 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뭐야? 또 거창이야. 또 관광하게 생겼네. 작년에 갔던 그 짜장면집 이름 뭐더라. 거기 또 갈까?”
초밥이한테 말하다가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맞다! 미가 거창에 이사 왔는데 한번 연락해 볼까?”
“그냥 집에 가. 근데 누구라고? 미이모? 그 훈남오빠네집?”
초밥이한테 미의 아들 사진을 슬쩍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런 건 절대 잊지 않는 초밥이었다. 그럼 화장해야 되잖아, 하면서 녀석은 화장품 파우치를 찾았다.
“집에 없을 수도 있어. 일단 톡 보내보자.”
나는 지나는 길에 보이는 ‘거창문화센터’를 사진을 찍어서 벌떼방에 투척했다. 정확히 13분 후 답장이 왔다.
“헉, 김준정 어디 가고 있는 거야? 거창이자나.”
그리고 18분 후에 온 두 번째 톡.
“고기 구워줄게. 놀러 와.”
첫 번째 톡과 두 번째 톡 사이에 18분의 간격이 있다. 18분은 무수한 추측과 우려와 고민이 오간 시간일 것이다. 나의 막무가내식 장난을 받아주려면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 둘은 갈등했을 거다. 이제 막 시댁과 친정 방문을 마치고 모처럼 집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을 방문객의 출현으로 망칠 것인가, 지킬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했겠지.
“주소 불러봐.”
나야물론 이 모든 걸 예상했지만, 캐릭터에 충실하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기세다. 나도 멀면 안 가려고 했는데 미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내가 있는 곳에서 2.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건 가야 될 운명이다.
5분 만에 우리는 미가 이사한 지 석 달쯤 된 아파트 주차장에 서있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방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돌진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어이 오라고 해서 이렇게 오게 되었네요.”
집에 들어서면서 나는 균오빠가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준정이, 여전하네, 사람 진짜 안 바뀐다는 그 말이 누가 했는지 딱 맞다.”
5일 전에도 50번쯤 했던 말로 균오빠가 첫 방어를 시작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초밥이한테 지시했다.
“초밥아, 저 아저씨 옆에 서봐.”
진지(소파)에서 몸을 낮추고 있는 균오빠와 초밥이를 한 프레임에 넣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상황에서 초밥이는 준비한 것처럼 포즈를 취했다.
“이 친화력 어디서 온 거야. 김준정 딸 맞다.”
“벌떼방에 사진 올리면 합성이라고 난리나겠다.”
미와 나, 초밥 세명은 식탁에, 균 오빠는 멀찌감치 떨어진 진지(소파)를 사수했다. 미와 초밥이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미: 와, 엄마랑 닮은 구석이 있는데 분위기가 다르다. 사진보다 더 예쁜데? 어떻게 된 거야. 키도 크고 건강해 보이고 너무 보기 좋다.
초밥: 미 이모도 사진보다 예쁘세요.
미: 어머, 나 세수도 안 했는데, 무슨, 세상에 성격도 좋다.
그러고 보니 미와 균부부가 바로 초밥이의 로망 ‘오래 사귀고 결혼한 친구 같은 부부’였다.
나: 두 사람 CC에서 부부가 되었잖아. 너의 로망을 실현한 사람들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
초밥: 오래 연애하고 결혼해 보니까 어떠세요?
마: 하하하하, 그런 질문 받으니까 너무 웃기다.
미는 뭐라고 했나. 연애는 많이 해볼수록 좋다고 했던가, 한 사람하고만 연애하고 결혼하는 건 생각보다 좋지만은 않다고 했던가, 아무튼 초밥이는 돌아오면서 균오빠가 은근히 웃기고, 성격 좋아 보인다며 그런 사람이 남편이라도 좋겠다고 했다.
*
벌떼를 만나고 난 다음날 광대뼈가 아팠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근육통이 생기는 것처럼 심하게 웃고 난 후유증인 광대 근육통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아, 균오빠 공격 하나가 떠올랐다.
"오빠 이게 얼마만이에요?"
"왜, 니 전남편하고 같이 봤잖아."
아, 나의 과거를 가지고 놀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