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은 혼자는 온갖 궁상을 떨어도 상관없지만, 남자에게 궁색한 모습을 발견하면 마음이 식어버리는 사람이다.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학생은 차도 없고, 돈도 없다면서 학생은 사귀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울 정도였다. 추운데 돈이 없어서 어디 들어가지 못하고 걷기만 하는 상황을 내가 민망해서 못 견뎠다. 학생이니까 차가 없고, 돈이 없는 건데 그걸 왜 부끄러워했을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남자를 바랐던 것일 수 있다. 한편으로 지질해도 괜찮은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거라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돈이 없어도 괜찮고, 조금은 비겁한 행동을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애써 찾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초밥이와 나의 관계는 나에게 이례적이다. 서로 지질한 모습을 보면 재미있고, 한편으로 측은해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초밥이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그렇다.
한 번은 내가 피자를 사 온 적이 있었다. 피자는 적어도 5년 안에 먹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는데, 초밥이가 먹고 싶다는 말을 흘린 게 나를 움직이게 했다. 토요일이라 초밥이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는 보미랑 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피자가게에 전화로 주문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찾아왔다.
내가 피자박스를 들고 들어오자 초밥이의 눈이 계란만 해졌다.
“엄마가 웬일이야. 피자를 다 사 오고. 어머머, 이게 뭐야? 치즈크러스트잖아? 이거 진짜 엄마가 샀어? 헐, 엄마가 치즈크러스트에 돈을 쓰다니 믿을 수가 없다.”
초밥이의 반응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인간이라서. 이유인즉슨, 처음에 주인이 물어보지도 않고 치즈크러스트로 주문을 받길래 내가 다급하게 확인을 했었다.
“치즈크러스트 아닌 건 얼만가요?”
주인은 약간 멈칫하더니 메뉴판을 확인하는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3,000원 저렴한 가격을 알려주었다.
“그럼 그걸로 할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보니 어쩌다 먹는데 3,000원을 아끼느니 맛있게 먹는 게 낫지 하고 마음이 바꾸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금방 주문한 사람인데요, 치즈크러스트로 할게요.”
이런 내막을 얘기해 줬더니 초밥이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막 웃어댔다.
나: 근데 3,000원 때문에 고민하니까 가난한 거 같아서 슬프냐?
초밥: 아니. 웃긴데?
이런 식의 일은 우리에게 일상이다. 두 가지 일화를 더 소개해보겠다.
어느 평범한 하루, 내가 몸에 밀착이 되는 헬스복을 입고 방에서 나오자 식탁에 앉아있던 초밥이가 그러는 거다.
초밥: 엄마, 겨드랑이 뭐야? 구멍 난 거 아니야?
나: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원래 디자인이 그래. 봐봐 양쪽 다 뚫려있잖아. 이걸로 실험해 볼 수 있다? 나의 경제 사정을 아는 사람은 구멍이 난 걸로 보일 거고, 모르는 사람은 원래 그런 옷인 줄 알 거야. 크하하.
초밥: 아닌 것 같은데? 엄마 이리 와봐. 이것 봐봐. 박음질이 풀려서 실밥이 나왔잖아. 뜯어진 거 맞아. 뭐야. 하하하. 그래놓고 디자인이래. 우하하.
옷이 뜯어졌다는 사실보다 내가 더 당황한 이유는 초밥이가 나의 궁핍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걸 확인시켜주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제육볶음과 쌈채소로 아침밥을 차렸는데 초밥이가 고추를 보더니 이러는 거다.
초밥: 엄마 혹시 이 고추 어제 식당에서 가져온 거야?
나: 야! 너는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왜 고추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 건데!
초밥: 전에도 가져온 적 있으니까 그렇지.
나: 소주 시켰다가 남은 걸 들고 온 적은 있지. 한 잔밖에 안 먹었는데 어떻게 놓고 오냐? 그래도 맹세컨대 고추를 집어온 적은 없어!
이걸 왜 맹세까지 하면서 해명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얘는 나를 얼마나 없이 보는 건가 싶어서 조금 억울했다.
또 어느 평범한 하루, 월명산 산책을 하고 들어오는 길에 소면과 애호박을 사서 잔치국수를 끓였다. 국수를 두 개의 그릇에 나눠 담고 초밥이를 불렀다. 초밥이와 마주 앉자 내 입에서 감탄사처럼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나: 엄마는 이런 거 너무 좋아. 2500원짜리 소면이랑 1000원짜리 애호박으로 국수 끓여서 너랑 먹는 거.
초밥: 나도 좋아.
나: 이런 것도 가스라이팅인 건가?
초밥: 이런 가스라이팅은 좋은 거 아니야?
가스라이팅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나온 말이다. 초밥이가 내신 관리하는 게 버겁다고 하자, 함께 있던 내 친구가 엄마가 선행수업을 시켜주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초밥이가 이렇게 답을 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가스라이팅 당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후회한 적은 없어요.”
'초밥이는 어릴 때부터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는 것보다 나가서 노는 걸 좋아했다. 그런 사람이 노력으로 교수나 연구원이 되어도 행복하지 않을 거다.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충만하게 하는 일이 있을 거다'
내가 주문처럼 외었던 말이다. 하지만 초밥이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것도 내가 미리 조정한 거라는 생각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나의 생각을 강요했구나 하고.
한 사람을 키우는데는 의도하지 않아도 부모의 가치관이 거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이런 거름을 묻어두고 싶다. 궁색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식는 게 아니라 웃음이 터지는 사람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것,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았을 때 돈을 기준으로 삼았던 나의 지난 시간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받는 농담 속에서 초밥이에게 돈이 공처럼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지질한 엄마의 너무 큰 야심일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