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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박 Feb 11. 2021

첫사랑 (1991) 1

"In love lies the seed of our growth." 

"Because when we love, we always strive to become better than we are."               

- Paulo Coelho 


열 다섯.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당시 선행학습을 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원을 다니게 된 나는 지극히 평범한 ‘모범’ 여학생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천방지축에 목소리도 큰 나는 조금은 유별난 아이었다. 귀여운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별로 이쁘지도 않았고 절대 날씬하지도 않았던 내가 어떻게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 아이, K 군을 알게 된 건 그 학원에서 였다. 당시 ‘모범적’이었던 우등반 남학생 여학들은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건만 알아서 서로 무리지어 교실 반대 편에 앉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K 군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 달이 좀 넘어서인 것 같다. 하루 온종일 학원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K 군의 선량함과 똑똑함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K 군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던지 우린 수업 시간에 눈이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 갔다.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어도 눈빛만으로도 난 K 군이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K 군이 날 좋아하는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자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꿈 깨!’라고 했다. 이것이 친구냐 왠수냐 싶었지만 친구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K 군은 준수한 외모에 공부도 잘하고,거기다 착하기까지 했으니까. K군 같은 애가 뭐가 아쉽다고 널 좋아하겠니?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겠지만 (?) 그 당시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날씬하거나 이쁘지도 않고, 하이에나와 같은 웃음 소리까지 가진 날 누가 좋아하겠냐고! 친구의 그 모진 말 후엔 난 아무에게도 내 맘을 털어놓지 않았다. 아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줍게 눈만 마주치며 K 군과 함께한 3 개월의 긴 겨울방학이 끝이 나고 있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난 K 군보다 학원을 먼저 그만 두었다. 학원도 그만 두는 상황에 난 무작정 K 군에게 내 맘을 털어 놓기로 했다. K 군은 어차피 나와 다른 도시에 있는 특수 고등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K 군이 내 맘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시 볼 일도 없으니 그것으로 끝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CD도 없던 시절이라 레코드 가게에서 내가 좋아하는 팝송 테이프*를 하나 사고, 난 거기에 또박또박 이쁘게 적은 메모를 붙였다. 


너 나랑 친구할래?

우리집 전화번호는 xxx – xxxx 야. 


(* 내가 K 군에게 선물한 테이프는 Voices that care 라는 걸프전 참전용사들을 위해 David Foster 가 만든싱글앨범으로, 셀린디옹,마이클볼튼, 윌스미스등당대의유명가수와메릴스트립과리차드 기어같은 배우들이 코러스에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준비한 선물을 아직 학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그 왠수같은 친구다) K 군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아마 K 군은 내 선물을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받았을 것이다. 난 주말을 전화기만 바라 보며 K 군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누가 먼저 받을까봐 뛰어가서 평소와는 다른 ‘조신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내가 간절히 기다리던 K 군의 전화는 아니었다. 결국 일요일 오후 난 마음 속에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리며 K 군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K 군을 잊어야지 다짐하고 있었다. 


K 군 때문에 실망스러운 난 괜시리 배고프다는 핑계로 엄마에게 온갖 짜증을 내었다.그런데 그 와중에 걸려온전화 한 통. 짜증이 난 탓에 조신함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난 본연의 나로 돌아가 평소의 우악하고 투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H 집인가요?”

 아...그렇다. 그것은 K 군의 전화였다. 


이제와서 목소리를 바꾸지도 못하겠고...난 목소리를 최대한 죽여서 말했다. “네...”
“나 K 군인데....” 


신기하게도 K군의 전화를 받고 나서 언제 배가 고팠냐는 듯 나의 배고픔은 사라졌다.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하루 다섯 끼를 먹는 식신에게서 배고픔도 없애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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