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runch.co.kr/@everlucy/2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K 군이 다른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 우리는 한 달에 한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정성스럽게 손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릴 때의 그 설레임, 우편함을 열어 볼 때의 기대감, 편지가 없을 때의 실망감과 마침내 기다리던 편지- 예쁜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에 손으로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적은- 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느껴보지 않고선 모르는, 지금처럼 이메일이 보편화된 때에 느끼기 힘든,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정이다.
K 군은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왔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에야 (그 당시에는 놀토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K 군은 토요일은 가족과 보냈고, 일요일에 학교에 돌아가기 전에야 잠시 짬을 내 나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인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영화를 보고, 같이 밥을 먹는 것 뿐이었다. 그 당시 덩치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나는 사실 K 군과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 조차 너무 쑥스러웠다.
K 군과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팔이라도 스치면 정말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처럼 찌릿찌릿하고 흥분되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나는 괜시리 K 군 옆에서 걷는 게 쑥스러워서 한 두 발짝 떨어져 걷곤 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사귄지 일년이 되도록 K 군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 사실 난 내심 K 군이 먼저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지만, 올곧은 K 군은 끝까지 성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본능에 충실한 인간인지라, 기다리다 못해 어느날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슬며시 K 군의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끼고서도 혹시나 K 군이 싫어하면 어쩌지하고 마음을 졸였지만 막상 팔짱을 끼고보니 K 군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K 군도 남자였던 것이다. 흐흐.
거의 항상 우리는 아침 조조 영화를 보고선, 점심을 먹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음식점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학생이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아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점심은 햄버거나 분식이 거의 전부였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평상시와 같이 영화를 보고 햄버거를 먹으러 갔는데, 그 날의 양상추는 잊을 수가 없다. K 군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햄버거를 베어 먹으려는데, 이 놈의 양상추가 끊기지 않는 것이다. 당시 K 군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 할 만큼 부끄러움을 탔던 나에게는 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는지... 난 햄버거를 입에 물고 이로 양상추를 끊어보려 각고의 노력을 해봤지만 양상추는 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햄버거를 입에 문 채 K 군에게 ‘잠시만’이라고 우물우물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숨기고서야 손가락으로 그 놈의 양상추를 절단시킬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햄버거를 잘 먹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해, 헤어질 때는 늘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짧은 만남이 모범생이었던 우리에겐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아 더 좋았던 것 같다. 난 전교 일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K 군도 세계 물리 대회에서 상을 타오는 등 우리는 학생의 본분에 넘치게 충실했다.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공부를 잘 해서 나는 내가 살던 소도시 일대에서 유명세를 조금 탔었다. 아니 사실은 덩치도 크고, 별로 이쁘지도 않은 여학생이 K 군 같이 괜찮은 남학생을 사귄다는 것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밑천으로 K 군을 사귄거냐며 놀라워하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느 날인가는 등교길에 나와 K 군의 얘기를 내가 모르는 아이들끼리 수군대고 있는 걸 들은 적도 있으니, 그 일대에서 내 첫사랑은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얘깃거리였다.
정말 K 군은 나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었을까? 나의 질문에 K 군은 내가 귀엽다고, 특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뜰때면 토끼같이 귀엽다고 대답해 주었던 것 같다. 쌍거풀도 없이 살에 파묻힌 작은 눈을 크게 떠봤자 얼마나 컸겠냐만은 그것조차 귀엽게 보였던 건 분명 사랑의 힘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