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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박 Feb 20. 2021

첫사랑 (199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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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K 군은 나보다 훨씬 이쁘고 날씬한 여자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다. 나 말고도 K 군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K 군이 말해줘서 안 사실이지만, 같이 학원을 다녔던 L 양은 K 군이 나와 사귀는 걸 알면서도 K 군을 계속 좋아했다고 한다. K 군에게 말도 못하고 애만 태우던 L 양을 보다 못한 L 양의 친구가 K 군을 만나선 L 양이 그 동안 K 군을 위해 써왔던 일기장을 건네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K 군은 나와 헤어질 때까지 그 일기장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나 같으면 호기심을 참지 못해 받자마자 열어 보고도 남았을텐데 말이다. 과연 그 일기장을 열어보지 않았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아니, 그 일기장을 받고도 L 양에게 마음을 흔들리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일기장을 열어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K 군의 행동은 나에대한 배려와 존중없이는 나올 수 없었던 행동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며 우리는 일년을 넘게 만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했던가? K 군과 한번도 크게 싸운 적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K 군에게 소소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K 군은 패션이라던가, 브랜드라던가 속물적이고 외적인 것에 대한 ‘센스’가 좀 부족했다. 둘이 사귀고 맞은 나의 첫 생일 선물로 나는 K 군에게 장갑을 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은근히 당시 유행하던 베*통이나 다른 이름있는 브랜드의 장갑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K 군이 내게 준 장갑은 시장에서 파는 브랜드 실밥도 찾아볼 수 없는 하얀 벙어리 장갑이었다.


지금이야 그런 ‘센스’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 물질에 눈이 먼 속물적인 나에겐 실망스러운 선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K 군에게 불만같지도 않은 불만이 늘면서, 당시 같이 영어학원을 다니던 D 군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D 군에게 관심이 가면서 K 군에게 불만이 늘었는 지도 모르겠다. K 군이 착한 남자의 전형이라면, D 군은 나쁜 남자의 전형이었다. 이기적이지만, 자신감이 넘치고, 게다가 공중전화 뒤에 여자가 기다리고 있으면 (단, 예뻐야 한다...) 동전을 넣어주는 센스까지 갖춘 D 군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마흔 넘게 인생을 살면서 배운 건, 이런 종류의 남자는 ‘절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하지 못한 건 왜때문인가...).


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D 군 때문에 학원 가는 것이 즐겁고, 설레기 시작했다. 반면에, K 군에 대한 내 맘은 조금씩 식어만 갔고, 난 어느새부터인가 K 군을 아주 싸늘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학원을 그만둔 후에도 우리는 종종 학원에 다녔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 자리에 나가서 나는 여자친구이면서도 K 군에게 시선도 한 번 주지 않을 만큼 K 군에 대한 내 마음은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변해버린 내 마음을 K 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생일이 아직 채 오지 않은 어느 겨울의 일요일, K 군이 시내에 있는 한 서점 앞에서 잠시 만나자고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K 군은 생일 선물이라며 내게 한가득 선물을 쥐어주었다. 아무 영문도 모른채 한가득 받은 선물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해하며 나는 K 군에게 무슨 선물을 이렇게 많이 주냐며 물었다. K 군이 대답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선물을 못 줄 것 같아서...라고. 그렇게 K 군은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언젠가는 K 군과 헤어져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K 군이 먼저 헤어지자고 할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K 군의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상처를 입었고, 그 동안 K 군과 주고 받았던 편지와 선물을 모두 학교 소각장에 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처음 맞는 이별에 상처를 입었지만, K 군은 내가 안겨준 배신감 때문에 나보다 더 아프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K 군과 헤어진 후, 나는 공부와 먹을 것에만 집중하며 고 2, 고 3 을 보내고, 수능을 치뤘다. 수능을 치른 후, 나는 내 평생에 처음으로 다이어트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그 당시 내가 했던 다이어트는 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 그냥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굶는 건강을 해치는 단순 무식한 다이어트였다. 오전 11 시 정도에 배터지게 한끼를 먹고선, 하루를 견뎌냈다. 오후가 되면 찾아오는 배고픔을 견디기 힘들어 나는 9 시도 되기 전에 억지로 눈을 붙였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던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다이어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했던가? 크하하. 한 달만에 나는 5kg 이상을 감량했고, 엄마는 그 때 내 몸에서 허리라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다시 한 번 K 군을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그 동안 입학 시험 준비로 다들 바빴던 학원 친구들이 수능이 끝나자 모이기로 한 것이었다. 모임에 가면 K 군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없다. 다시 K 군을 본다면, K 군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난 K 군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고, K 군이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숨기고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K 군을 만났다. 모임 내내 서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만, 난 눈빛 만으로도 K 군의 마음이 아직 내게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모임에 다녀온 날 난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K 군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공중전화에서 K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사귀게 되었다. 곧 대학생이 될 우리는 예전에는 가지 못했던 커피숖에서 대화를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영화는 우리 데이트의 중요한 일부였다. 하지만 이제 영화는 영화관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비디오방이라는 것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둘 만의 공간에서 방해받지 않으며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비디오방에 드나들었었다.


그렇게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보던 12 월의 어느 날. 영화가 거의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것 외엔 어떠한 경험도 없었던 우리 였지만, 정말 영화처럼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우리는 첫키스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좁고 어두컴컴한 비디오방이 내 첫키스의 장소라는 것이 조금은 슬프지만, 내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그리고 나를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해줬을 K 군이 내 첫키스의 상대였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고 엄청나게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K 군과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K 군은 S 대에 진학했지만, 같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나는 재수를 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K 군은 바빴고, 어느 날인가부터 점차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가지 못해 우리가 헤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곧 헤어졌다. 헤어짐을 미리 짐작했던 탓인지, S 대에 진학하고자 했던 나의 확고한 결심때문인지, 난 큰 슬픔없이 두 번째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목표했던 대로 그 해에 S 대에 진학했다.


학교에 들어간 후 가끔씩 K 군과 마주쳤지만, 이제 우리는 정말 아무 감정이 남지 않은 친구로 서로를 대했다. 지금 K 군은 나와 헤어진 다음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딸 둘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다.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같이 맥주를 마신 어느 날 밤을 마지막으로 (현재 부인인 Y 양과 교제하기 전이었다) 이제 K 군과 나는 더이상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그 마지막 날 밤 K 군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사귈 당시 다 좋았는데, 내가 자기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어서 그것이 부담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기대를 그렇게 많이 걸었다는 건지? 그 얘기를 들은 지 10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K 군이 뜻한 바를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잠시 만난 사람이 나에게 그랬다. 내가 적어도 대학 총장이 되거나 책을 여러 권 쓰는 유명한 교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출산하면서 기억력도 낳은 것인지). 욕심이 많았던 예전의 나같았으면 한 술 더 떠서 노벨상 정도는 받는 아주 저명한 학자가 되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의 길이 쉽지만을 않음을 깨닫고 (교수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지 누가 말해줬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나에게 그의 말은 천근만근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그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그 동안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너는 이래야 해,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하며 내가 원하는대로 변하기를 강요하고 있었음을.


K 군과 헤어지고 십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나는 사랑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상대의 변화와 발전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하게 하는 것임을. 그래서 함께 할 배우자를 고를 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 얼마나 좋은 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혹은 그 사람의 사랑이, 나를 얼마나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라는 것을. (이걸 알면 뭐해.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는데...)


예전에는 키가 크고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이 좋았다. 돈이 많거나 조건 좋은 사람이 좋았다. 하지만 외적인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지금, 난 돈이나 다른 조건보다도 K 군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건 돈 많고 조건 좋은 사람보다 K 군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을 훨씬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직도 반짝이는 보석 같은 마음씨를 가진 누군가를 찾지 못했지만, 반짝이는 첫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준 K 군에게 감사한다.


“Every once in a while, you find someone who's iridescent, and when you do, nothing will ever compare.”

- 영화 Flipped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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