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Unsplash의 Blake Cheek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무진기행>을 읽는다. 두세 번 보아도 와닿지 않는 문장들이 있기도 했거니와 왜인지 속을 꽉 막히게 하는 이야기들이 쪽을 쉬이 넘길 수 없게 했다. 무진기행을 선물해 준 G는 술술 단편을 넘기는 재미가 있는 책이라는 소개를 덧붙였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 빨래방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한쪽. '이쯤이면 작가의 문장에 적응했겠지' 생각하며 또 한쪽.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미완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또 한쪽. 그렇게 한쪽 한쪽 넘겨 마침내 기행을 끝낼 수 있었다. 더듬더듬 읽은 소설의 조각들이 위장에 박혀 속이 쓰렸다.
왜 아팠을까. "숙이를 정릉으로 데려가 해치웠다."라는 문장이 역겨웠을까? 이성을 해치운다는 감히 따를 수 없는 행동에 압도되어 무릎 꿇었기 때문일까. 돼지를 통째로 들쳐 매고 산으로 가 돼지의 멱을 따곤 소주를 즐기는 친구들이 야만적이면서도 용감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취기를 빌어 종로, 을지로 그리고 동대문을 위태롭게 걸었던 지난겨울의 걸음을 '동대문 역사(力士)'는 비웃고 말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왜 한쪽 한쪽 넘기기가 고단했을까.
여기 <아톰x군>을 그리는 만화가가 있다. 밤새 속앓이 때문에 겨우 잠들었다 깬 아침이었다. 그는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지만, 그곳에서 <아톰x군>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의 배가 꾸륵꾸륵 신호를 보내왔다. 남자는 앞으로 그의 만화가 더 이상 지면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라 예감했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남자는 신문사의 문화부장을 만나 차를 한잔 마셨다. 슬픈 예감은 잘 들어맞는 법. "예, 배가····· 좀, 배가 퍽 아파서·····." 그는 만화가 잘린 이유를 '배앓이' 때문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로 작아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아내를 넉넉하게 안아주러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어깨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으리라. 이 안쓰러운 남자를 철저한 제3자로서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너무도 익숙한 패배감,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숨을 쉴 수 없었고 쓰렸다.
책의 쪽을 넘기면 넘길수록 뿌옇게 피어오른 안갯속에서 의지할 것 없이 혼자 헤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렇게 달력의 마지막 장을 뒤로했다. 새해를 맞아 어설프게 끓인 떡국을 먹어치웠다. 덜 우러난 국물과 고명은 종종 속을 어지럽히곤 한다. 안개를 닮은 떡국을 토해냈고 23살의 김승옥과 작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