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창작자를 위한 복음을 담은 콘텐츠 가이드
누군가는 창작을 전도의 목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크리스천 작가가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으로 작업하는 모든 창작에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메시지가 담기게 된다. 결국 창작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크게 보면 전도의 연장선에 놓일 수 있다. 또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더 많다. 그러므로 전도의 측면에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도는 내 힘과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전도는 먼저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는 은혜다. 때로는 상식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회심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거리를 걷다가 들리던 전도 메시지에 마음이 움직였고 누군가는 선물 받던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누군가는 자연을 바라보다가 신의 존재를 찾게 되기도 한다.
나는 12살 무렵 어느 일요일, 혼자 교회를 찾아갔다. 믿음의 가정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교회에 가라고 등 떠미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교회마다 상징처럼 달고 있는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자, 하나님이라는 신을 알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어떻게 알게 된 교회의 아동부 예배를 찾아갔다. 처음 간 날은 예배당 맨 뒤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는데, 두 번째로 간 그다음 주는 성가대석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맨 뒤에서 맨 앞으로 나의 예배 자리는 한 주 만에 옮겨졌다. 그저 성가대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예배가 끝난 후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을 찾아갔을 뿐이다. 그 후로 교회는 내 집이 되었고, 교회 친구들은 내 가족이 되었다. 그렇게 매주 빠지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지켰다. 그 믿음이 시작된 그 시점을 생각할 때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구나’라는 고백이 나온다. 그 어린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이라는 신을 어떻게 스스로 찾겠는가.
전도된 사람들의 일화는 각양각색이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성향과 삶에 맞게 찾아가 만나주신다. 우리가 그러한 이들의 고백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사람의 행동보다, 더 먼저 더 크게 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가족과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고, 말씀이 없는 곳에 예수님을 전하는데 일평생을 바치는 선교사님의 노력도 있다. 그렇게 애끓는 마음으로 전도에 온 정성을 쏟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 이들의 고백은 동일하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왜일까? 우리의 지식과 노력으로 신을 향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사무치게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내가 그런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상식으로 제한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창조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가장 창의적인 전능자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놀라운 방법으로 전하고 있으신 분이다. 이때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라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다.
1. 전도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하는가
2.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도 전도가 된다면, 굳이 창작을 통한 전도를 왜 탐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하는가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그 선물을 우리를 통해 전달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독불장군처럼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하는 은혜를 경험토록 한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많은 복음주의 교리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약해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나의 측면)
-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시길 원한다.
-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거룩한 자가 되도록 단련하신다.
-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도록 하신다.
(너의 측면)
-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받은 온전한 사랑을 흘려보내게 된다.
-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으로 완전해진다.
- 그 사랑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전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맺어진다. 부모님께로 받은 믿음의 유산, 지인에게 들은 복음, 낯선 이에게 받는 헌신 등과 같이 누군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과정 가운데는 관계의 통로가 존재한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고 말씀하셔서 회심하는 사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생각해보면 과거에 누군가를 통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접해봤을 확률이 높다. 각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피어날지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복음 전달자는 내가 복음의 통로가 되는 일이다. 즉,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넘치는 복을 흘려보낼 수 있는 축복을 받는 것을 뜻한다. 전도는 고리타분하고 성가신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을 갖고 갈 때, 우리가 전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과 감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인가? 크리스천에게 복이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시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온 천하를 다스리는 명망 높은 왕이 있을 때, 그 왕과 깊은 친분이 생길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왕과 가까워지고 싶을 것이다. 왕의 보호 아래 있다는 든든함과 왕이 나의 삶을 보살펴준다는 안정감이 찾아온다. 또 때때로 내게 필요한 것들이 선물로 주어지며, 부와 명예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일은 분명 복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창조한 전능한 왕인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복인가 아닌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더 깊이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선물을 받게 된다. (너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이웃 사랑을 강조하며,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찾아다니시며 사랑으로 품으셨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사랑을 전하라고 하셨다. 누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지 모르는 입장에서 우리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전도가
내 생각과 계획대로 달성되지 않는다고 무력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신 하나님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전도의 목적을 회심의 결과로만 접근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