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경찰의 눈물과 늙은 관리의 웃음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깊은 탄식과 함께 이 슬픔은 또 얼마나 이리저리 시달리게 될까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이 벌써부터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유가족의 아픔이, 함께 공감했던 이들의 아픔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도마 위 생선처럼 수없이 난도질당해왔던 일을 우리는 가까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었다.
참사가 시작된 순간 목이 터져라 울먹이며 안전조치를 하던 젊은 경찰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외신 기자들과 질의응답하던 늙은 관리의 영상도 보았다. 기자의 질문을 농담으로 눙치며 웃고 있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고 대하는 진심의 태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아니 사건이라고 말하기 조차 송구하게도 유가족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줄 이 참사는 외신기자의 질문에도 그 아픔이 담겨있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어떤 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사회현상의 하나로 무리들이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빈부 갈등, 노사 갈등, 종교 갈등... 갈등의 현장은 처절한 투쟁과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지만, 또 어김없이 그것들은 날 것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마치 갈등 그 자체로서 효능감이 필요한 듯 해소의 리더십은 아득하기만 했다.
여기에 하나의 갈등이 더 추가될 듯하다.
공감하는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르는 이들의 갈등.
아마도 공감의 대상 자체가 다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적 리더는 보편적 공감에 부합해야 공공의 비전을 이끌 수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핼로윈 축제가 어떻다 저렇다 말하지 말자. 개인의 취향일 뿐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그곳의 젊은이들은 어떤 이들이 좋아하는 법을 어긴 일이 없다. 오히려 수없이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했고 방법도 제시했다. 공론의 대상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이들이지 나들이 갔던 젊은이들이 아닌 것을.
황망한 유가족의 슬픔이 많은 이들의 아픔이 또다시 너덜너덜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젊은 경찰의 눈물과 늙은 관리의 웃음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