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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FT explorer 허마일 Feb 23. 2020

혼자가 아닌 우리는 결코 지지 않는다.(포도송이의 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끄적여본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초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산업자본주의의 위력이 발휘되는 시기의 미국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정 계층의 소수 미국인들은 전후 엄청난 부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지만, 자본이나 기술이 없는 도시민이나 농민들은 빈곤에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겪던 시절.

당시 실업자가 무려 천만 명이 넘었다니.. 20세기 초 화려한 조명을 받던 미국의 뒷면엔 가난한 자들의 좌절과 분노가 깊게 그늘지고 있었다. 


은행이나 회사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놈들은 공기를 호흡하지도 않고 고기를 먹지도 않거든요.

그놈들은 이윤이 있어야 숨을 쉰단 말입니다. 밥 대신 이자를 먹고살아요.

공기가 없거나 고기가 없을 때 당신들이 죽는 것처럼. 그놈들도 이윤을 얻지 못하면 죽어요.

슬픈 일이지만 그런 걸 어떡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런 걸.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민음사> 중에서 -

악순환은 어쩜 이리도 징글맞은 것인지.

미국 중부에 들이친 모래폭풍과 가뭄은 가뜩이나 힘든 농민들의 피까지 말려버린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은행에서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위기를 모면해보지만, 끝없는 가뭄에 농사는 계속 흉작이지, 쌓이는 빚은 갚을 길이 없지, 담보로 잡힌 농지는 트랙터가 와서 정리해버리고 (집을 그냥 뭉개버린다네 이 개객끼들) 땅을 뺏긴 이들은 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분노의 포도>는 이런 농민들의 모습을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주해야만 했던 한 가정 ‘조드 일가’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덤덤하고 건조한 문체지만 구체적인 상황설명, 내면의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참혹하고 처절한 사람들을 텍스트 밖으로 끌어내 살아 숨 쉬게 한다.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한번 가 보지 그래요? 거기에는 일자리도 있고 추운 겨울도 없습니다.

게다가 손만 뻗으면 오렌지를 딸 수 있어요. 그리로 가보지 그래요?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민음사> 중에서 -



그 유명한 아메리칸드림의 시작. 비옥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과실과 농작물 수확시기로 인부를 모집한다는 전단지가 중부에 퍼진다.

자 여기서 문제가 터진다. 대충 오백명의 인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자리가 급한 오천명이 너도나도 모이는 형국이 되었다. 아무리 일자리가 많다고 해도 밀려드는 사람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것이지.

치킨 한 마리에 사람 50명이 먹으러 달려들면 이해가 가려나? 오우 이건 제대로 악몽...!

사람이 몰려드니 시급 오천 원을 주던 거 이천 원만 준다고 해도. 아니 천 원, 오백 원만 준다 해도 막상 굶어 죽을 판국에 다들 한다고 납시니… 지주들은 이윤을 더 남겨먹는 개객끼들이 되는 거야.


"오키? 그게 뭔데요?"

"오키는 원래 오클라호마 출신이라는 뜻이었소. 하지만 지금은 더러운 개자식이라는 뜻이지. 

인간쓰레기라는 뜻이란 말이오. 그 말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 말을 할 때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알아요. 하지만 난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소. 당신들이 직접 가 봐야지. 내가 듣기로는 우리 같은 사람들 30만 명이 거기서 돼지처럼 살고 있다고 하더만."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민음사> 중에서 -


정말 최악은 기존에 있던 서부인들이 몰려드는 이주민들에게 두려움과 환멸을 느끼며 사람 취급을 안 해준다는 거였다.  아이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그들의 현실은 나이트메어였다.

그러나 이들의 아픔과 좌절은 공감과 이해의 통로가 되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으니… 공동체의 힘은 실로 대단하고 엄청난 것임을 작가가 살랑살랑 비추고 있다.


나는 문학 알못이지만, 이 책이 예술의 경지라는 것은 알겠더라. 

인물 하나하나의 두려움, 불안 욕망과 선악함들 같은, 인간이 가진 본성들을 잘게도 심어 놓았다. 절망속에서 사람들은 많이도 변하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900페이지가(민음사) 넘어가는 묵직함에도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책을 보는 건지 넷플릭스를 보는 건지, 페이지를 거침없이 술술 넘어가게 만드는 흡입력은 놀랍다.

흰 도화지 같은 내 머릿속에 텍스트만으로 많은 이미지와 영상들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데, 이 흡입력은 독자를 곧바로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는 능숙함과 친절함을 갖춘 격이 다른 것이었다.


책 읽는 일주일동안 조드네 가족과 함께 했는데요, 

산 넘어 또 산, 고추보다 매운 세상살이, 아프고 괴로운 여정이지만 아름다운 여정이었습니다.

머나먼 여정의 후유증… 일까요. '로저 산'의 결말은 정말 미쳤습니다.

여러분도 꼭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 울림과 여운을 느껴보시라.

벽돌 책을 끝냈다는 뿌듯함은 한참 후에 밀려올 것입니다.


모래폭풍, 가뭄보다 무서운 코로나 19가 들이쳐 저도 난민까지는 아니지만 집에 틀어박힌 반 백수가 되었습니다. 따흑 ㅠ 모두가 힘든 때입니다.

우리도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다 같이 손잡고 함께 분노해? 달콤한 승리를 맛볼 수 있기를!

힘을 내어 봅시다! 두 주먹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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