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m Sep 26. 2020

내향인의 개 산책

영양가 없고 시답잖은 건 마찬가지지만 MBTI 글은 아녜요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 산책에 나섰다지. 루틴을 동경하지만 불규칙 유전자가 있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의무와 책임이 있을 때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할 동력이 생긴다. 강아지 산책이 그렇다. 나는 강아지 두 마리의 보호자다. 얘네 엄마를 떠나보냈을 때 남은 죄책감은 평생 갈 것이다.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려면 남은 두 마리에게 잘해주는 수밖에. 강아지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겠나. 밥이랑 보호자와 함께 있는 시간, 그리고 산책이다. 둘의 행복을 위해 매일 산책을 간다. 시간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제목에서 언급한 내향인 얘기가 아직 안 나왔다. 난 가끔 친한 친구도 외향인이라 착각하는 내향인이다. 나를 외향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사회적 가면 때문인 듯하다. 고독하고도 어두운 나의 내면을 드러내면 사회에서 고립될 터. 그래서 상황과 사람에 맞는 페르소나를 쓴다. 강아지 산책은 밖에서 유일하게 내 가면이 벗겨지는 때다. 내가 어떻게 남들 눈에 비칠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강아지들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다. 사람 얼굴을 보며 상호작용하기보다 시선을 땅바닥으로 향한다. 쉴 새 없이 씰룩거리는 강아지 코를 눈으로 좇는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여유롭게 걷지 않는다. 강아지 산책은 세상에 맞서는 전쟁이다. 내게는 지켜야 할 강아지들이 있다. 세상은 녹록지 않다. 3m마다 담배꽁초가 보인다. 강아지가 밟거나 냄새 맡지 않도록 줄에 긴장을 준다. 새와 쥐들만 다녀갈 듯한 풀숲에 용케 유리조각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가래침, 껌딱지, 꽁초로 가득 찬 하수구... 땅만 보며 걸으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난다. 이리저리 뛰고 멈추는 강아지들은 내 맘을 모른다. 다치지 않게 줄을 잡아당기면 움? 하고 다시 갈 길을 간다.


그러다 보면 내 안의 파시스트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속마음을 살짝 공개하자면 이렇다. 담배꽁초와 각종 쓰레기를 길에 버린 사람들이 죽으면, 그들 몸안에 평생 버린 쓰레기를 꽉꽉 채워 넣자. 아마 공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욱여넣고 시체를 깊은 바다에 수장하자. 바다에 몹쓸 짓일까. 어차피 그 쓰레기들 놔두면 바다로 다 흘러가게 돼있다. 플라스틱 담배 필터는 바다새 먹이가 되고, 과자 봉지는 미세 플라스틱으로 분해돼서 인간 입으로 돌아온다. 최소한 죽어서라도 버린 사람이 책임지란 말이다.


위험한 상상인가. 이게 강아지 산책이 닿는 끝이다. 인간은 '악'! 잠깐 숨을 돌린다. 뭣도 모르는 에코 파시스트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한다. 다시 걸으며 주변을 본다. 누가 우리 강아지들을 향해 다가온다. 귀엽고 반가운 건 알겠는데 오지 마세요. 아 만지지 마... 바이러스 묻었을지 모르는 손으로 허락도 없이 강아지를 만지는 사람 탓에 다시 화가 솟구친다. 노터치 배지 안 달은 내 잘못인가. 우리 초소로 갑자기 침범한 인간을 흘기며 강아지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마스크는 이럴 때 요긴하다. 입 모양을 숨길 수 있으니.


그밖에 으르렁대는 본인 강아지를 제대로 잡지 않는 사람, 무작정 개를 보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 사람을 보며 화나는 일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사람이라 그렇지 뭐. 그래도 매번 안 좋은 순간만 있지는 않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하늘 끝까지 치솟을 때 분노를 녹이는 천사들이 내려온다. 쌍 유모차에 나란히 탄 어느 아기들. 꺄아아~ 소리 내며 강아지들을 보고 "애기들 귀여워요"라 말한다. 강아지들이 유모차에 다가가 인사한다. 다시 꺄아아~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도 말씀하신다. "애기들 귀엽대요." 험상궂은 내 표정이 풀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