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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급한 나무늘보 Aug 12. 2021

수급자의 자격

한창 민원에 바쁜 시간 전화기에 구청 복지팀 직원의 얼굴이 뜨면서 벨이 울린다.

'내선번호를 잘못 눌렀나'

주민센터 민원 창구에서 구청 복지팀과 전화를 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는다.


민원을 처리하던 중에 오는 전화는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자면 앞에 앉아 기다리는 민원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진다. 대개 열의 아홉은 갑자기 자신은 바쁜 사람이라며 돌변하고 빨리 자기 일을 처리하라고 채근한다. 직원이면 그나마 다시 전화하겠다며 끊기라도 하지만, 민원인의 경우 일을 보던 사람이나 전화를 한 사람이나 서로 바쁘다고 하기 일쑤다. 곧 다시 전화를 드린다고 하면 그럴 거면 뭐하러 전화를 받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다행히 이번은 직원의 경우이므로 나는 마음 편히 직원이 뭐라고 하든 말든 처리 중인 민원이 있으니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말한다.


얼핏 부모가 자녀를 말소하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던 것 같다. 

또 무슨 복잡한 사정이기에 자녀를 말소하려고 하나, 민원인을 보내고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어르신이 수급자(기초생활수급자 등 복지 대상자)이신데, 자녀들이 등본에 같이 올라있어서요. 자녀들이 등본 상에 있으면 부양의무가 있기 때문에 수급 자격이 정지되는데, 실제로는 같이 살지 않고 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셔서 친척집으로라도 전입신고를 하시라고 안내드렸는데 그럴 여력이 안 되시나봐요. 혹시 말소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내가 근무하는 곳은 경제적 수준이 꽤 높은 곳이라, 복지 대상자도 다른 곳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래서 해외 거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뾰족한 것이 솟았다. 나는 어르신이 자녀분과 연락은 가능하냐고 물었다. 연락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녀분들이 외국에 거주할 정도면 수급자가 되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자녀분들이 주소를 정리하지 않고 외국에 나간 것에도 이유가 있을 테고 친척집으로 전입신고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본인 의지가 없다면 수급자격을 굳이 이렇게까지해서 유지시켜 주실 필요가 있는 건가요?" 따져 물었다. 


날선 나의 반응에 직원은 예의바르게,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녀들이 실제로 함께 거주하고 있지 않고, 선교나 기타 사유로 외국에 나가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꼭 해외에 거주한다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가정만은 아니다, 어르신이 근래 우울증이 와서 더더욱 무기력해진 상태라서 아무리 가까운 친척집에라도 딸들을 전출시켜라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해도 안 되더라, 그래서 혹시 동(동 주민센터)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알아보려고 한다, 말했다.


여전히 나로서는 그 직원의 적극성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대략 현지이주신고에 대해 알려주고, 무엇이 되었든 그분들의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당사자들이 알아봐야 할 자세한 문의처에 대한 내용까지 전달한 뒤에 그 일을 잊고 있었다.


내가 잠시 복지업무를 맡았던 때에 지인이 내게 물었다. 집안 어르신이 좀 편찮으신데 병원비가 많이 나와서 수급자 신청을 하려고 재산 명의를 직계가족에 돌렸는데, 자식들의 재산도 조회하는지 부양의무자 조회를 어디까지 하는지 궁금하다고. 나는 수급자 관련 업무와 조금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생초보였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지만 그 지인이 정말 어려운 처지라서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열과 성을 다해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인의 남편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자신은 누가 봐도 알 만한 명품 소비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외모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지만, 실제로도 창구에서 만나는 일부 수급자들은 도대체 왜 수급자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의 사람도 있다.


며칠 뒤 한 어르신이 주소와 이름을 쓴 흰 봉투를 내밀며 자녀들을 퇴거신고 하겠다고 말했다. 

"퇴거신고는 없구요 어르신, 새로 이사하실 주소지에 전입신고 하시면 돼요"

"우리 딸들을 이 주소지로 옮겨줘"

그 주소지는 우리 관할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르신은 신분증도 없이 그 봉투만 덜렁 들고 오셨다.

메모지에 관할 주민센터를 찾아 적은 뒤 말을 건넸다.


"봉투에 적힌 이 사람, 누구예요?"

"돌아가신 우리 형님.."

"네? 그러면 이 주소지에 지금 누가 살아요? 세대주가 누구예요?"

"아마..형수님이겄제.."


그제서야 복지팀에서 전화했던 대상자가 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


"자녀분들 어디 계세요?"

"외국에.."

"그럼 형수님한테는 자녀분들 형수님댁에 전입신고 하겠다고 연락하셨어요?"

"아니..해야 되는 거예요?"


이 어르신은 자녀들을 대신 전입신고 할 수가 없다. 주소지의 세대주가 누군지도 정확히 확인해야 하고, 세대주가 어르신 말대로 형수님이라고 한다면 형수님의 동의와 도움이 필요한 상황. 최대한 메모지에 크게 절차와 준비물을 적는다. 구청 직원 말대로 어르신은 정말 무기력해 보였다. 형수님에게 전화를 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구청 직원의 성화에 못이겨 어찌어찌 며칠 만에 주민센터에 나오긴 했는데, 이 복잡한 일을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내 가슴도 답답해져왔다. 차라리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맥 풀린 사람처럼 앉아있는 어르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님은 왜 외국 나가신 거예요?"

"하나는 뭐 한다고 나갔고, 하나는 선교한다고..하와이에 있어요"

"통화는 되세요? 통화 되면 굳이 형수님한테 부탁 안 하고 할 수 있는 방법 알려 드릴 수 있어요"

"일년에 한 두번..전화 오나.."


어르신에게 다시 흰봉투와 메모지를 쥐어주면서 형수님이랑 꼭 통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돌려보내면서도 그 힘없는 어르신의 등허리가, 발걸음이 내내 마음을 짓눌렀다. 


성경에서 말하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수급자로 살아가는 부모. 우울증을 앓는 부모를 두고서 선교를 하러 간 딸.

하나님이 제시한 첫 계명과 하나님의 일이 부딪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곱씹다 이내 도리질을 했다. 이미 나의 오만과 편견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나. 


어찌 됐든 어르신이 꼭 형수님과 잘 이야기하고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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