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름끈 Jan 06. 2023

그들은 언제나 나를 울린다

video 1 :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그해 겨울은 유난히 외로웠다. 연말이 다가오자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인생을 허비해도 되는 건가 싶어 초조했다. 한해의 마지막날 나와 놀아줄 이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나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살 빼겠다며 등록만 했지, 운동하러 간 날은 손에 꼽을만했었다. 트레이너가 유산소부터 하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고 지루한 운동시간을 때우기 위해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러다 오래전에 봤던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는 채널을 발견했다.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기 해남전이었다. 심지어 채치수가 부상으로 빠진 절망적 상황에서 서태웅이 엄청난 기세로 활약하며 해남을 추격하는 장면이었다.


 슬램덩크를 대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난 삽시간에 몰입해서 혼자 울컥해 눈물을 훔쳤고, 의미 없이 휘젓고 있던 두 다리를 멈추고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운동량이 거의 없어 피부는 매우 보송했다.) 집 근처 책방에 들러 슬램덩크 만화책 전권을 모두 빌렸다. 가족들이 모두 TV 속 보신각 타종행사를 보면서 새해 덕담을 나눌 때 난 내 방에 처박혀 정신없이 북산의 플레이에 빠져 있었다. 분명히 예전에 2-3번 본 건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새해 아침은 슬램덩크와 함께 맞았고, 며칠 뒤 슬램덩크 소장본 전권을 구매했다. 그 책들은 몇 차례의 이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의 책장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유일한 만화책이다. 자주 들여다보진 않지만, 한번 펼치면 언제나 나를 벅차오르게 해 줄 테니까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이제 그런 감정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요즘은 표값이 비싸 개봉한 후 1-2주쯤 입소문을 살펴본 후 극장을 찾는 편인데(그래서 더 안 가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분명 그들은 나를 웃기고 울리고 벅차오르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테니까. 물론 내 예상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영화의 인트로에 북산 선수 다섯의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 이미 코끝이 찡해졌고, 내가 그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깨달아 버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온 마음을 쏟는 그들의 순도 100%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도전정신은 언제나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학창 시절의 나도, 그해 겨울의 나도, 그리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만 있는 지금의 나도 그들의 투지 앞에서는 금세 무장해제되고 만다. 조금은 뻔하고 때로는 작위적이고 살짝 촌스러울지라도 상관없다. 그들의 땀은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행복했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

 슬램덩크를 보다 보면 누구나 최애가 생기기 마련. 나의 최애는 서태웅이다. 김수겸, 윤대협 등도 사랑했다. 난 무시무시한 실력과 승부욕을 가지고 있지만 평소에는 심드렁하고 여유 있는 잘생긴 포커페이스들이 좋다. 하지만 북산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모두를 아끼고 응원하게 된다.(나의 눈물버튼은 언제나 채치수다.) 만화책 안에서는 개인의 서사가 가장 빈약했던 송태섭이 영화에서는 메인으로 등장한다. 만화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추가되어 슬램덩크 전체 서사의 깊이가 더해졌다는 점에선 오히려 좋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마저 바꾼 건 아쉽다. 소연이의 편지는 그들 모두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하게 만드는, 담백하지만 충만한 결말이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영화의 에필로그는 송태섭 개인에게 의미 있는 결말이었으며, 특히 정우성과 함께 있는 장면은 그간 슬램덩크 서사에서 드러내 왔던 능력치에 비해 너무 과한 성장으로 보여 아쉬웠다. 하지만 이 아쉬움은 1% 일뿐 나머지 99%는 눈물과 감동으로 가득 차 있으니 슬램덩크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들은 꼭 극장에 가서 보시길 바란다.


++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슬램덩크를 모르시는 분들은 웬만하면 원작을 먼저 보고 가시길 추천한다. 당연히 학원스포츠물이니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감동의 '' '깊이'에는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이 랫동안 쌓아 올린 시간과 땀을 알아야 영화  산왕전의 플레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알게 된다. 채치수의 고맙다는 말이, 눈도 제대로   없는데도 던지고 있는 정대만의 3점슛이, 강백호가 떠올린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소연이의 말이, 그리고 서태웅이 하는 '패스'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명작은 그렇게 겉핥기로만 봐서는 안된다. sbs 애니메이션 버전 말고  만화책으로 보고 가셔서 나처럼 마음껏 울고 오시길.



 

     

작가의 이전글 나를 초라하지 않게 하는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