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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끈 Apr 16. 2023

당신이 믿고 싶은 진실

video 4 : 드라마 <안나> with <친밀한 이방인>

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이 꾸는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이 내 것처럼 달콤하고 쓰렸다. 나는 그들은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착각, 혹은 간극 속에서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정한아, 작가의 말 중에서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가끔 유미처럼 보는 이가 두려울 정도로 어이없는 질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궁금해진다.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음이 자명한데도 무엇이 그들을 질주하게 만드는 것인가. 거짓으로 점철된 삶일지라도 한순간이라도 절박하게 손에 쥐고 싶은 게 있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친절한 이방인>(또는 <안나>) 속 유미를 보면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욕망에 눈이 멀어 내린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그녀에겐 이뤄내고자 하는 큰 그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를 모면하기 위해 태연하게 더 큰 거짓을 선택한다. 변화의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허위를 온몸에 두른 채 기꺼이 그 흐름에 올라탄다. 그리고 최악이 닥치기 전에 매끄럽게 도망친다.


 "여태까지 그러했듯이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는 지금껏 그때를 아는 감각으로 살아남았다."


 드라마를 먼저 본 후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근래에 보기 드물게 아주 성공한 각색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과 드라마 속 이야기는 각기 다른 변곡점을 만나 뻗어나가고, 차별화된 함의를 지닌 채 증폭된다.


 드라마 <안나> 속 변곡점은 정치적 야욕을 가진 남편과의 만남이다. 그에게는 트로피 같은 안나가 필요했다. 그녀가 기꺼이 따라 들어간 그의 세상에는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쓸모'였다. 그녀는 그 세상에서 현재의 '가장'을 지켜내기 위해 힘들게 계단을 오른다. 멋들어진 차림새를 하고서 말이다. 그녀가 더 이상 트로피가 되어 주지 못할 땐 어떻게 될까. 지독하고도 태연한 거짓 속에 그녀는 기묘하게도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의 거짓이 들킬까 나도 함께 마음을 졸이게 되고, 나도 모르는 새 그녀의 죄를 추궁하기를 그만두고 어쩔 수 없었다며 기꺼이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인적이 뜸한 그곳에서 그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은 채 망연하면서도 단단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보는 안나가 그 무서운 질주를 멈췄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우습게도 말이다.



 소설 <친밀한 이방인> 속 변곡점은 진과의 만남이다. 이전까지는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기느라 스스로를 부풀린 거였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유미의 마지막 거짓(적어도 우리가 아는)은 타인과 함께 목적을 이루고자 만들어낸 전략적 제휴였다. '나'와 함께 독자들은 유미의 지난날을 되짚으며 그녀의 행각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사실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내내 찾지 못하고 있었다. 뚜렷한 목적 없이도 그녀는 기꺼이 거짓된 삶을 살았고,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손을 놓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진과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의도를 가진 분명한 사기 행각이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는 말 뒤에 숨을 수 없었다. 연민을 품고 그녀를 위한 변명을 잔뜩 준비해 뒀던 나는 당황했다. 그래서 서술자인 '나'가 느낀 절망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겹겹이 쌓여왔던 그녀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녀의 실체를 목격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나'의 기대와 달리 그냥 '치졸한 거짓'일뿐이었다. 그녀가 따라왔던 배는 단지 '침몰한 난파선'일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에서야 묻는다. 이 사기극에서 이유미의 배당금은 얼마인지를.


 내가 느끼는 고통에 가까운 상실감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곳에 함께 있기를 바랐다. 이유미가 진에게 돌아와, 마침내 삶의 빛나는 대목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들에게 구원과 회복이 가능하다면, 나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p.233-234)


 드라마와 소설 모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드라마는 심리스릴러로서의 미덕을 많이 지니고 있다. 거짓의 대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눠질 수 있으나 1인칭 관찰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니 인물의 심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배우의 탁월한 연기가 큰 몫을 했다. (그녀의 작품을 오랜만에 봤는데, 정말 놀랐다.) 이에 비해 소설은 삶의 거짓과 진실에 대해 조금 더 본질적인 화두를 던진다. 내가 믿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던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어진다. 작품을 끝낸 후 여운이 더 많이 남았던 건 드라마, 생각이 더 많아졌던 건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마침내 고된 수색 작업이 다 끝났을 때, 그의 손에는 넉넉한 급료가 쥐어진다. 이제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날 수 있고 원하는 만큼 바다를 헤엄쳐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지난여름 사이, 무엇인가가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텅 빈,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깊은 바다 밑바닥의 난파선, 그 안을 둥둥 떠다니는 부속물, 해수에 불어 형체를 잃고 미끄덩거리는 이끼류, 그것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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