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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08. 2021

나는 무엇이길래?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나는 내 인생의 3분의 1 가까이를 깨어있지 못한 상태로 살았다. 육체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것이 아닌, 내면의 의식이 깨어있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나는 하루 동안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다. 그 생각들이 나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 그 생각들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기 바빴다. 어느 날 나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면, 내가 의도하지 않게 자동반사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그 생각들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이 생각들이 어떻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지 그저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 자신과 동일화되어 있었고, 마치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허우적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내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과 나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들을 내가 조종할 수 없으니 하루하루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의 전부는 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된 후로 나의 일상은 달라졌다.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의연할 수 있었고, 불안하지 않았으며 여유로울 수 있었다.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나를 통해 살았다. 


내 머릿속 생각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나'라는 개념을 먼저 배운다. 나는 흔히 이름, 나이, 직업, 가족,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등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자라면서 앞서 나열한 것과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들로 만들어져 간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과 자연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고, 나의 정체성은 곧 내 이름, 내 직업,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나의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규정짓는 것이 곧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만일 내가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의 일부가 없는 것이었고, 이는 곧 나를 불안하고 힘들게 했다. 내가 아끼는 소중한 물건이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그것은 나에게 속해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했다. 나를 기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은 늘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 세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서 너무 힘들고 저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너무 행복했으며 이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다가도 또 저 사람 때문에 행복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일은 늘 나와는 구분되어 있는 바깥세상 속에 있었고 나는 항상 그것들에 대처하며 살아야 했다. 


   세상과 분리된 내가 있으므로 '너'도 있었다. 그들과 비교하며 나의 정체성을 던 견고히 해야 했고, 그들과 경쟁했다. 나를 정의 내리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아무리 노력해도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고, 늘 만족스러울 정도로 채워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고 우리 안의 생각들을 통해 미래 안에, 과거 안에 살면서 지금 현재에 할 수 있는 일을 보다 객관적이고 현명하게 알지 못했다.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느끼는 이들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듯했다. 그 정체성은 결국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개념들에 의해 자라오면서 나는 그 개념들이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생각들이 나를 이리저리 휘둘리게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모든 것을 애써 잘하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정체성이 위협받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의 정체성은 사회가 만든 개념들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내가 생각하는 요소들로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성취해도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관찰하고 불필요한 생각들은 제거하려 시도했고 그럼으로써 의식이 깨어있도록 했다. 의식이 깨어있을 때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상태에 있을 때만큼은 나는 나 자체로 온전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개념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된 이후로는 외부적인 어떤 사건이나 누군가가 나를 뒤흔들어 놓지 못했다. 마음이 힘들어지거나 기분이 안 좋아지려 할 때는 떠오르는 생각들이 어떻게 내 기분을 망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습관과 같은 것이어서 처음 몇 번 시도했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나는 일들에 나를 빼앗기는 것이 일쑤였지만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될수록 나는 스스로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외부 세계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고 꾸며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내가 과거에 나를 정의 내렸던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 인생을 더 현명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일어나는 일들에 나를 빼앗기지 않았는지, 내 마음이 도망가지 않았는지 관찰하며 깨어있으려 한다. 언젠가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깨어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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