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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Aug 05. 2021

제주도 여행

2021년도 : 제주도 하나



두 젊은이가 있다. 키가 고만고만 비슷하고, 화내는 방식은 다르지만 화해를 하는 방식은 같다. 

둘 다 침대에 드러누워 고래고래 큰 소리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 사람은 이태원의 달동네 붉은 기운이 감도는 포근한 집에서 뚱뚱하고 얌전한 고양이와 함께 산다. 

한 사람은 경기도, 15년 전의 유행 인테리어 벽지를 바른 15년 된 아파트에서 많이 먹고 많이 뛰는 근육질의 개 두 마리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허리가 휜다.


둘 중 더욱 매력적이고 눈매가 시원하며 목소리가 큰 이는 나다.

둘 중 더 손이 섬세하고 얌전하며 눈이 작지만 어른들 보기에 흐뭇하게 생긴 이는 내 남자친구다.


나는 몇년 째 지속되는 무기력과 게으름 그 사이에서 버둥거리며 겨우 졸업을 했다. 1년 반째 일하던 의류매장에서는 진급을 준비하던 중 매니저와 더러운 꼴을 보고 일을 그만두었다. 수능이 끝난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알바를 안 하고 생활해본 적이 없다. 나의 첫 빈 시간이다. 

남자친구는 반년간 한 학기를 함께 지내며 준비하던 시험을 막 끝냈다. 그에게는 시험 결과와 지원에 따라 앞으로의 몇 년간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결과에 따라 앞으로는 한동안 없을 수도 있는 자유시간이다. 우리는 함께 한 달간의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설레는 감정만큼 마음 한 켠에 먹구름도 드리웠다. 너무 싸워서 헤어지는 거 아냐? 나는 결혼을 믿지만 연애는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약속은 기대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좋은 때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후회로 가득찬 악몽이 되어버릴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아침부터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사이가 서먹해졌다. 둘다 학생 및 백수 신분이라 비용을 아끼느라 저렴한 시간대 비행기를 예약했다. 가는 날은 늦게, 떠나는 날은 아침 일찍 목적지에 도착한다. 둘 중 더 절약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양보를 하긴 했지만 이것부터가 불만이었다. 


밤 늦게 도착한 숙소는 내부가 깔끔하고 정원이 잘 꾸며진 듯 했지만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일단 짐을 내려놓고 동네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여름밤 공기도 콧구멍을 텁텁하게 막는다. 바다 냄새와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동네는 내가 스물 두 살때 세달간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머물렀던 시골 마을이다. 나는 떠난 곳에 다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았던 추억은 추억일 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탕 탕,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 싫다. 사람 싫어 살기 싫어 끝판왕 마인드다. 


편의점에 들러 제로콜라와 예거 마이스터 한 병을 샀다. 술 잘 안 먹는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드링크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숙소에 들어오니 돌 얼음 한 봉지가 그새 녹아있어, 짐 정리를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다시 얼려서, 붙어버린 얼음을 쾅쾅 쳐 깨트렸다. 건배! 앞으로 한 달, 우리 어떻게 될까?

모든 게 다 잘 될거야. 아주 소중한 추억이 될 거고, 레운이는 죽을 때까지 이 여행을 후회할 일이 없을거야. 내가 약속할게. 

남자친구는 고마운 말을 해 주었다. 내가 믿는 것은 그 약속이 아니다. 진심을 담은 표정을 보면 내 마음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 


우리는 요가를 했다. 길고 긴 사바아사나에 이어진 무의식에 푹 빠졌다. 완전한 밤의 무의식으로 빠지기 전에 나는 계속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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