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게으른 오전을 보내기로 결심한 날엔 이상하게 새벽부터 눈이 번쩍 뜨이고 만다. 괜한 의미를 부여할만하여 몇 번을 곱씹게 만드는 꿈을 꾼 아침도 아니었고, 벌집꿀이 올라간 요거트를 주문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며, 몰라도 되는 뉴스들로 한탄을 하기엔 마음이 좀 빈약한 날이었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4시간. 무심하면서도 말끔한 모습으로 등장하려던 소망을 포기하면 불가능한 계획도 아니었다. 그럴 땐 생각은 뒤로, 일단 집히는 대로 주워 입고 나가고 본다.
서울에 사는 게 만족스러운 점은 마음만 먹으면 새벽에도 갈 수 있는 곳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모든 싫은 점들이 상쇄가 될 만큼 그 하나가 좋다. 삶의 애환을 달래는데 돈가스와 우동만으로도 충분하단 사실을 가르쳐준 식당이 코로나 이후 새벽 영업을 종료했단 소식을 들었을 땐 눈앞이 좀 깜깜하긴 했지만, 남대문 꽃시장만큼은 여전히 이른 새벽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이 내겐 큰 위안이다. 오늘처럼 나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더더욱.
1.
빗방울이 거세지는 속도를 따라잡고자 보폭을 늘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누군가 반가운 사람을 발견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그 반가운 사람이 나였다. 다짜고짜 휴대폰부터 내밀어야 하는, 비행기모드를 해제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노년의 남성에게 MZ 세대로 추정되는 사람이 골목 어귀에서 등장하면 하긴, 나 같아도 좀 반갑긴 하겠다. 터치식 폴더폰을 몇 번 조작하니 출근길 지하철이 사람들을 토해내듯 밀린 문자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아침부터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려 집 밖까지 나와야 하는 사정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지만 (해결해 줄 가족이 없는 건지, 혹은 가족 몰래 휴대폰을 숨겨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한 건지, 혹시 그런 거라면 설마 어떤 범죄 조직에 기이한 방식으로 가담하고 있는 건지!) 그 사실을 확인할 새도 없이 남자는 주춤한 자세로 홀연하게 사라졌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부르르 떠는 휴대폰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환희로 가득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이상한 출발이군,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2.
시장 근처의 카페에서도 이상한 오전의 서막은 계속 됐다. 카페인도 없이 실랑이를 벌일 자신이 없어 라테한잔을 주문한 터였다. 씁쓸한 우유를 홀짝 대면서 빗소리를 들으며 멍청하게 있는데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허겁지겁의 기운이 느껴졌다. 우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우산을 들고 있는 젊은 점원이었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놓은 덕택에 헤드폰 속 음악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뒤섞여 기묘하게 들렸다.
내 가슴 우산을 두고 가셨어요 모두 태워
비 맞으시면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안되잖아요 워어-
친절은 돌고 돈다더니 비행기 모드 한번 해제했다고 우산이 제 발로 돌아오는군, 우주의 법칙에 감탄하려는 찰나, 시간을 보고 깨달았다. 조금만 더 늦장을 부렸다간 빗속에 홀딱 젖은 삽살개 행색으로 약속 장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3.
짱구 교장선생님의 난폭한 버전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아저씨의 꽃집은 시장 초입에 있다. 네모난 금테 안경이 눈에 띄는 그의 첫인상은 과격하긴 하지만 가만 보면 스윗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거베라의 개화 상태와 선물할 친구의 취향, 혹은 지난번 샀던 꽃도 거베라였던 것 같은데 내가 언제부터 이 가느다란 꽃잎들을 좋아하게 됐는지 따위의 생각에 잠겨 지난 행적을 유추해보고 있으면, 무턱대고 다가와 옆에 놓인 파스타까지 가져가는 대가로 2천 원을 빼주겠다 호통을 치는 식. 그 호통에 놀라 뒷걸음질로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왜 아직도 빈손이냐고 슬며시 웃으며 말을 건네는 식이다.
흥정과 수작 사이의 곡예에 능하다면 시장은 정말로 재미있고 아니라면 전쟁터가 확실하다. 평소엔 전자에 가까운 편이지만 그날은 무참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병사의 처지까진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참담한 심정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서 나보다도 거대한 꽃더미를 한 아름 안고 벼락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어 졌달까.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4.
익스큐즈미. 하우 캔 아이 겟 히어?
아아.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오늘 나, 정말 챗GPT 같이 생겼을지도.
인도식 악센트에 잡혀 고개를 돌린 곳엔 곤란한 표정의 외국인 여행객이 지도를 펄럭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꾸깃한 지도 한 구석엔 그가 그린 게 분명한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져 있었다.
삼성 플라자.
스토어도 아닌 플라자? ‘삼성’에 홀려 ‘플라자’는 개의치 않아 했을 외국인의 시선이 불 보듯 뻔했다. 시계를 봤다. 서두르면 멀끔까진 아니더라도 머얼-끔 정도는 가능한 시간이었다. 다시 그를 봤다. 휴대폰과 빔프로젝터를 사고 싶다고 했다. 챗GPT 답게 물어본 말에만 충실히 대답할 것이지 자꾸 맥락을 읽는 인간의 역할을 넘보는 스스로가 싫어지고 있었다.
5.
30분 뒤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택시에 올라탔다. 남대문 시장부터 용산 아이파크몰, L사 백화점 본점 8층에 위치한 삼성 스토어와 관련된 지리적 설명과 대한민국의 교통 시스템, 그와 더불어 N사의 지도 앱 사용법까지 논하느라 몹시 피곤해진 상태였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인 스스로에 대한 감탄과 경이는 커녕, 졸음이 쏟아져서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두 눈을 감으려는데 느지막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허허. 꽃이 참 이쁘네요.
그 말에 또 흐뭇해져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결국 종로와 독립문을 지나 신촌을 지나고 있을 때쯤 나는 택시 회사의 부조리한 수수료 정책부터 기사님의 가족 형태, 그날 그의 점심 메뉴까지 알게 된 후였다. 머나먼 타지에서 가정을 꾸린 결과 대한민국에서도 다할 필요가 없었던 헌병의 의무를 타국에서 하게 된 아들에 대해 말하다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사람 있습니다
자식이라고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겸허함과 아픈 손가락을 마주할 때의 울컥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여기로 오게 되는 것이 인생이란 걸 알면서도 굳이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인걸까.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을 어쩐지 그날은 조금 알 것만도 같다고도 생각했다.
6.
이미 한참을 늦어버린 약속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싱크대에 물을 가득 받으며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 짧은 시간에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말을 걸어온 이상한 일도 다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난 뒤 기억을 되짚으며 주거나 받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비로소 인생의 법칙을 찾는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준 것보단 받은 게 많다는 결론에 늘 도달한다. 그 생각은 또 이런 질문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 나머지 지나치게 애를 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