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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Jan 02. 2022

난로 앞에서 편 책들


   존경하는 연주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었다. 예전에는 캠핑의 매력을 몰랐어. 겨우 장작으로 모닥불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앉아 있으면 불을 쬐고 있는 내 상판은 타들어가서 바짝바짝 건조하고 등 뒤로는 바람 불어 춥고. 이런 기분이 정말 너무 별로였거든. 근데 한 5년이 지나고 다시 캠핑장에 가서 불을 쬐고 있는데, 이번엔 아주 다르게 느껴지는 거야. 앞은 따땃하니 포근하고, 등은 시원하니 몸의 균형이 잘 맞는 거지. 모닥불은 똑같이 그대로였어. 시간이 지난 후 그 앞에 있는 내가 변한 거였지.



   나도 그랬다. 넘쳐나는 정보와 미디어의 속에서 관심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흐른다. 전엔 내게 주옥같았던 책일지라도,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관심사는 유기적이고 차츰 점점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나에겐  어떤  속에서 헤엄치고 나오는가가 중요한 사안이 된다. 나의 작고 좁은 세상은  세계의 작가들의 생각과 글로  확장되고 깊어졌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내가 서점 가판대 앞에서 집는 책의 기준 또한 끊임없이 변해왔었다.



    작년부터 가져왔던 교육에 대한 단상들을 정리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결속시키기 위해 올해 봄부터는 IB 바칼로레아에 관련한 책, 논문, 기사 등을 수집해 읽기 시작했다. 교육에 대한 고민이 축소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는 글과 기록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었다. 심리상담을 다시 시작했던 올해 여름 끝무렵엔 내면으로 파고드는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의중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군중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 하나의 출발이었다. 겨울 시작점엔 뮤직 비즈니스에 산업에 직접적으로 발을 담그기 시작하며 각종 산업, 시장조사, 경영과 관련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어떠한 분야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참 고지식하지만 정통법이라 할 수 있는 접근법을 늘 선택해온 셈이다.



    바람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1월 저녁, 달궈지는 구불구불한 스토브의 회로를 바라보며 집은 책은 두 권. 바로 올리비아 랭의 '이상한 날씨 <Funny Weather, Art in Emergency>',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파롤 'La Parole'였다.  비평과 자기 고백을 넘나드는 특유의 글을 쓰는 작가로 평가받는 올리비아 랭은 책 속에서 위기가 범람하는 세계 속 예술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이 우리의 세계관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탐구한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프랑스 철학자로, 책을 통해 일반 교양인에게 실존 현상학적 관점에서 언어철학을 소개한다.



      책은 현재 다양한 형태의 문서를 검수하고 리터러시를 높이며 이에 나의 정체성을 투영해 미래를 그리는 현재 중심 키워드와 가까이 맞닿아 있다. 물론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지도 않았고 저항과 회복에 예술이 관련을 맺는 방식에도 뛰어난 뜻을 두고 있지도 않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고통과 희망을 응시하는 글들은 분명 (MD 추천 의도처럼) 분명히 내게 회복의 에너지를 전할 거라 믿기에 고른 책이었다.



    이처럼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랑 그리고 음악은 어떠한 카테고리로 서로 묶여있고 얼마나 튼튼한 연결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고찰로, 결국 내가 지금 어떤 책을 고르느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한참 책에 파묻혀 편평한 세계관을 넓히려 노력하는 내게 필요한 건 천둥처럼 번쩍 얻어지는 토르의 신적 능력도 아니고, 스칼렛 위치처럼 라이프 포스를 흡수해 얻는 엄청난 힘도 아닌, 바로 옆에서 날 데워줄 따듯한 난로와 맛있는 차 한잔이 된다. 차를 홀짝이며 서서히 데워지는 온도를 느끼며 책을 한 장 한 장 (비록 디지털일지라도) 사락 넘기는 맛이란!



    내가 읽는 책은 곧 나를 이룬다. 책장에 꽂히고 들려지고 팔리고 다시금 누군가에게 읽히는, 고착되지 않는 책들을 따라가다 보면 늘 변화하는 나의 관심사와 상황 그리고 비전이 보인다. 이처럼 고마운 저자들의 글들은 어느 장소에서건, 어느 시간에서건 내 속으로 들어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올해 읽은 책이 (논문, 짧은 산문, 시 모두 포함) 총 117권이라는 숫자를 이루었더니, 한 뉴스레터에서 이를 주제로 인터뷰까지 신청해왔다. 무대가 사라진 없는 음악인만큼 절망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잠잠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책만큼은 놓지 않았던 한 해였다. 때문에 이만큼 배우고 성장했으면 이제 그만 바라도 되지 않냐는 누군가의 질문에는 이런 답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배움을 소망하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죽는 것과 다름없다. 한 해동안 나를 이루는 책들은 무엇이었나 거꾸로 생각해보는 이런 시간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



    어젯밤엔 1cm 정도의 미미한 눈이 내렸다. 해가 밝은 도시는 얼룩덜룩한 발자국으로 가득하고, 길고양이들은 추위와 싸우며 생존 의지를 드러낸다. 시간은  평등하고 이렇게  해가  시작되며  속에서 나란  사람은 그저 묵묵히 책을 읽는다. 차도 한잔 마셔야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금씩 성장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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