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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울 넘버

by 레일라

“모든 이에게 건네는 위로”, “인생영화”라는 평을 받는 ‘소울’. 처음 이 영화가 나왔을때만 해도, 재즈 뮤지션이 주인공인 스토리라는 말에 뮤지션들의 삶을 어설프게 버무려 놓은 시놉시스일거란 미심쩍은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뉴욕 거리, 클럽, 긱 씬 등 모든 현장에 재즈가 생동감 있게 담겼다는 평이나 블루레이 소장각이라는 극찬이 넘쳐날 정도의 인기를 전해 듣고 나니 궁금한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보통 이정도의 호들갑을 접하면 왠지 모를 반감에 사로잡혀 시청을 미루는 편인데, 배경이 뉴욕인데다 제이미 폭스의 연기도 보고 싶었던 겸 미루던 작업을 해치우고 극장으로 향했다.



‘소울’은 재즈에 열중하던 피아니스트가 사고를 당해 영혼들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 어린 영혼의 멘토로 활약하는 동시에 아직 이승에 남은 몸을 되찾는 여정을 그린다. 솔직한 평을 풀자면 영화 내내 결론에 다다르기 위한 지진부진한 연결고리적 상황들에 조금 지루했지만, 몇몇 알람을 울리는 요소들 덕분에 이 영화가 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영화인지를 깨달았다.



영화에 몰입 할 수 있었던 이유 한 가지다. 주인공인 조 가드너가 힘겹게 중학교 시간제 강사로 일을 하면서도 재즈음악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꿈꿀 수 있었던 이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듣고나서부터 마음에 재즈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달구어온 뮤지션. 만약에 내가 뉴욕의 핫한 재즈 클럽에서 동경하던 재즈 뮤지션의 밴드에 오디션에 합격한다면, 바로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무대로 설 수 있다면 나 또한 믿기지 않아 뉴욕 거리를 폴짝 폴짝 뛰어다닐 것이다. 물론 조 가드너처럼 맨홀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는 스토리는 너무나 가혹적이지만 말이다. 영화의 ‘엔딩’ 상상에 심혈을 기울여 시청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납득될 만한, 모두가 그 자리에서 만족할 만한 적당히 이상적인 엔딩을 바란다. 영화는 팍팍한 세상과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하니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존 바티스트가 영화속 음악을 담당했고, 주인공인 조 가드너가 건반을 치는 장면은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건반 위를 물흐르듯 굴러다니는 그의 연주를 보다보면 실제 라이브 영상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인데, 영화 속 배경에 흐르는 재즈 스탠다드 음악을 듣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재즈 자체가 메인 테마인, 재즈 뮤지션이 사는 삶이 배경인 모션픽쳐를 극장가에서 시청하는 느낌은 뭐랄까, 아주 쉴새 없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랑의 얼굴을 마주한 것 과도 같았달까. 101분의 러닝타임 내내 이 영화의 의도에 흠뻑 빠져버렸다. 실제 감독은 데이비스와 허비 행콕의 협동 콘서트 영상에서 ‘계획을 벗어났다고 버리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을 뭔가 값진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은유적 메시지를 얻고 이를 영화에 반영했다고 한다. 음악 시퀀스가 만들어진 이런 생생한 음악 씬의 배경엔 허비 행콕Herbie Hancock같은 실제 재즈 뮤지션들의 세션 참조가 존재했다.



"그건 목적이 아니야, 그건 그냥 사는 거지"
영혼의 목적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영화 설정 중 유독 실감나는 뉴욕 배경 모습도 이 영화의 묘미다. 10년전, 내 기억속 그 어느 곳보다 바빴던 도시가 아직도 저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추억을 따라가기도 하고. ‘Great Beyond’ 태어나기 전 세상에 대한 묘사도 단순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풍경이 익숙한데...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의 배경 모든 곳이 따듯하고 아이러니하게 편하게 느껴진다고 느낄 것이다. 후미진 뉴욕 골목길의 구석 모퉁이도, 퀘퀘한 지하 재즈 클럽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길거리 간판도...이상 세계와는 또 다른 현실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도 어떤 일에 집착하게 되면 어둠의 영역에 갇혀 괴물로 변하고, 삶의 보람을 잃어버린다는 설정은 다시 떠올려도 오싹하다. 나 또한 내 자신이 한 주제에 꽂혀 집착과 미련에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고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펀드 매니저인 한 남자는 오직 ‘결제해’ 만을 외치며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박은 괴물로, 자책과 자기혐오에 갇힌 22번 영혼은 ‘나는 안될거야’, ‘나는 유별나’ 를 중얼거리는 괴물로 변한다. 그들의 괴물화된 모습이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해 섬뜩했다. 한 가지 목표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하지 않았던 지난 몇 년간, 나는 내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 사실 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었다. 집착과 미련 그리고 자책에만 몰두해 꽤나 오랜 시간을 낭비했고, 집착성에 한계를 느꼈을 때쯤엔 마음과 몸의 건강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 아마 그 시간 속 나의 가여운 영혼은 어둠의 영역에 갇혀 사막같이 메마른 땅을 파며 어딘가를 헤매고 있지 않을까?



매 순간을 기쁘게 여기며 살아가는 마음가짐은 멋진 전제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가능한 일일 것 같진 않다. 때론 망각은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매 순간 기뻐할 순 없지만, 매 순간 좌절하기만 해서도 안된다는 말이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즐겨야 함을 알려주는 영화의 메세지는 이렇게 간접적이지만 꽤나 힘있는 도달성을 지녔다. 삶에 무기력해지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 무기력감에 무릎을 꿇는 동시에 정신이 지배당할 때, 다시 한 번 꼭 시청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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