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곁'의 미학과 때

by 레일라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누구로 둘지 정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바뀌게 되는 경험을 자아내고, 나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나아가 삶의 방향까지도 결정짓기 때문이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모하는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존재에 대한 타인의 영향력이란 참으로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 여긴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들을 관찰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깨닫게 된다. 이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과 함께할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셈이니까.



관계가 만드는 변화: 미세하지만 절대적인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곁에 두면, 나 또한 달라진다.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의 기록을 정리하게 되고, 구매 가치에 대한 기준을 갈고닦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사람의 습관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발견한다. 충동적으로 구매하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 이미 가진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소비가 곧 자아실현이라 여기던 시대에, 물건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절약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두 명치의 음식 조리를 해보지 않은 터라 어림잡아 넉넉히 준비한 음식이 늘 남았던 것에 잔소리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 점차 세심하게 계량하는 습관을 들이는가 하면 요리 준비 과정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된다. 처음에는 사소한 지적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실은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것은 환경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했고,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준비한다는 것은 효율성과 계획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무심코 과잉 준비하는 습관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영향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의 반면교사가 되어주거나 도리어 생각을 굳히게 만들어주는 이도 있다.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적당한 여유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배운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를 보면서, 나는 관대함과 이해의 가치를 되새긴다. 그들의 모습 앞에서 나의 기준은 균형적으로 단단하게 굳혀지기도 한다.

맹목적으로 이상화하는 일은 경계하지만, 이처럼 나에게 여러모로 배움을 남기는 사람은—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오랫동안 기억하고 자주 떠올리는 편이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선택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영향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부할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인연의 유한성과 선택의 무게


사람은 이렇게 늘 넘어지고 배운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후회를 통해 성장한다. 늘 나중에서야 깨닫는 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영원한 것은 없기에 기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10년 가까이 마음의 곁에 두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남남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충격적이다. 특히 오랜 시간 함께했던 관계가 끝날 때, 우리는 그 관계에 투자했던 시간과 감정,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온 나 자신의 일부를 잃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관계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관계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을 약속할 수는 있지만, 영원을 보장할 수는 없다.


내 '곁'에 누군가를 둘 것인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질문이다. 존중할 수 없으면 친구가 아니라 했고, 배울 수 없으면 친구가 아니라 했다. 이는 단순히 까다로운 기준을 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의미다. 존중과 배움이 없는 관계는 결국 서로를 소진시킬 뿐이다.


나의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는 나와 멀어지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인연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진다. 누군가의 잘못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때로는 삶의 환경이 바뀌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변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성숙의 과정이다. 다만 우리는 그 선택의 순간들 앞에서 더욱 신중해질 뿐이다. 신중하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가치를 알고, 그 관계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미칠 영향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글쓰기의 재검토


한동안 '공개적이고 사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 여러 일들과 상황이 겹쳐 지인들과 나누는, 또는 칼럼 준비인 원고 외에는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부족보다는,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두려움이었다. 코로나 이후,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글에 얼마나 다양하고 세세하고 억압적이고 만연한 세뇌가 깔려 있었는지 인지하고 나서, 안 그래도 지나치게 검열하던 나 자신에게 다각면으로 질문을 갖기 시작했던 터였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표현들, 무의식 중에 전제하는 가치관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권력 구조 안에서 학습된 것임을 깨닫는 순간, 글쓰기는 더 이상 자유로운 표현의 수단이 아니었다.


내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던 많은 것들에게 '원래'는 없다고 스스로 답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원래 부드럽다? 아니다. 남성은 원래 강하다?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은 원래 보수적이다? 아니다. 청년은 원래 진보적이다?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래' 또는 '자연스럽다'라고 여기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반복적으로 학습된 것들이다.


온갖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배경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질문의 조각을 공부에서 찾으려 애써왔다. 드라마 속 가족의 모습, 광고 속 행복의 이미지, 뉴스에서 선택하는 단어들. 모든 것이 특정한 관점을 반영하고, 특정한 가치를 강화한다. 중립적인 재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는? 나의 언어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특정한 세계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내 입맛대로의 질문들이 좋은 대답을 추출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나의 관점 역시 제한적이고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글, 연구, 영상, 말들의 조각을 듣고, 읽고, 삼켜가며 수없이 많은 경우를 담아야 했다. 젠더, 계급, 인종, 장애, 성소수자, 세대, 지역 등 교차하는 억압의 구조들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도 계급이 있고, 장애 여부가 있고, 성적 지향이 있다. 각각의 교차점에서 경험하는 차별은 다르다.


하나 편견과 미세한 차별을 전부 배제하기란 어렵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선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다. 배워가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조금씩 지워가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아마도 평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적을 받았을 때 방어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관점을 경청하는 것. 그리고 실수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고,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



계보 만들기와 관계 쌓기:


수많은 학자들의 작지만 위대한 조각들을 내 안에서 바느질하듯이 꿰매며, 나만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상의 전통 안에 서 있는지, 누구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상을 물려받는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생각은 이전 세대의 고민과 논쟁의 산물이다. 문제는 그 계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능동적으로 구성할 것인가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날카로운 분석, 탈식민주의 학자들의 저항적 사유, 퀴어 이론의 전복적 상상력, 비판적 인종 이론의 구조적 통찰. 이 모든 것들을 내 안에서 대화하게 만들고, 나만의 언어로 재구성하려 애써왔다.


새로운 인연의 돌파구들이 생기기도 했고, 그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일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기도 했다. 학문적 공동체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단순한 동료 이상이었다. 그들은 나의 생각을 날카롭게 비판해 주는 비평가이자,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안내자이자, 함께 고민을 나누는 동지였다. 세미나 테이블에서의 열띤 토론, 논문 초고에 대한 신랄한 코멘트, 연구 방향에 대한 진지한 조언 등. 지난 대학원에서 쌓은 경험은 상상 너머였다. 그것은 단순히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물음표를 다는 법을 배웠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를 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적 탐구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임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누구와 함께 보내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환경, 나의 상황, 당시 나의 경제활동, 나의 여유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학원 생활의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 과도한 노동, 불확실한 미래. 이런 조건 속에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단순히 개인적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즉, 내가 누구와 함께 있기를 '선택'하는가는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방향으로 사고할지를 선택하는 일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지도교수 아래에서 안전한 주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주류 학계의 인정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비판적 경계에서 목소리를 낼 것인가.


그 사이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인연은 차곡차곡 쌓아가고, 발전하고, 믿음을 주고받고, 실수하고, 또 용서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동료들도, 선생님들도, 나 자신도. 우리는 모두 배우는 중이고, 모두 실수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로부터 배우고, 서로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되, 내 삶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을 기꺼이 웃으며 환영하고, 또 웃으며 보내주게 된다. 신중하다는 것은 폐쇄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가치를 알기에, 새로운 만남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다. 그리고 웃으며 보내준다는 것은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길을 존중하고, 함께한 시간을 감사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결국 남는 것


공부는 멈추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이해하는 일도, 내 안의 편견을 마주하는 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학위를 받는다고, 책을 다 읽는다고, 나이를 먹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역설을 경험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 혹은 여전히 함께하는 이들의 삶과 그들만의 서사에 평온이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어떤 이는 빠르게 앞서가고, 어떤 이는 천천히 자기만의 길을 찾는다. 어떤 이는 주류의 길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비주류의 경계에 머문다. 그 모든 선택이 존중받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한다. 그 변화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라는 질문에 담긴 진정한 의미다.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의 망 속에 존재한다. 그 관계들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다시 그 관계들을 만든다. 그러므로 묻는다. 나는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인가. 누구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누구에게 영향을 줄 것인가. 어떤 대화에 참여하고, 어떤 침묵을 지킬 것인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다시금 묻는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든 것은 죽지만 사랑만은 예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