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선 뒤에서 증명해야 하는 무명의 삶에 대하여
툭.
입국심사대 위로 던져지는 여권 소리는 늘 건조하다. 세계의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며 닳아버린 여권의 모서리. 그 안에는 내가 통과해 온 도시의 스탬프들이 훈장처럼, 혹은 지우고 싶은 얼룩처럼 겹겹이 찍혀 있다. 공항은 화려한 면세점의 조명 아래 숨겨진, 가장 차갑고 거대한 검문의 장소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이 담긴 작은 수첩 하나를 내밀며, 내가 위험하지 않은 존재임을, 이 땅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음을 간곡히 증명해야 한다.
입국심사대의 대기선 뒤에 서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한다. 지난번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공항의 공기는 유독 눅눅했다. 심사관은 내 여권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얼마 전 찍힌 인도의 입국 스탬프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찰나의 침묵. 그 짧은 공백 사이로 국가 간의 오랜 증오와 의심이 스며든다. "왜 인도를 갔었지?"라는 질문은 날카로운 메스처럼 내 평범한 여행의 기억을 헤집는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도, 내 여권에 찍힌 파란 잉크 한 자국 때문에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해야만 했다. 사실 이 문제가 예상되었기에 인도에서 한국을 들어왔다가 이틀 뒤 다시 같은 거리의 파키스탄으로 가기도 했지만, 설명이 길어질수록 '나'라는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잠재적 위험'이라는 분류 체계 속의 데이터만 남는다. 그 순간, 여권은 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성적표가 된다.
홍콩에서의 경험은 그와는 정반대의 서늘한 속도로 기억된다. 줄은 길었지만 흐름은 기계적이었다. 심사관은 내 얼굴을 보는 대신 모니터의 픽셀을 본다. 여권이 넘겨지고 스탬프가 찍히는 소리는 컨베이어 벨트의 소음처럼 인간의 개별성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소거되는 듯했다. 늘 관광객이 많은 나라여서 그렇겠지만 너무 빠른 통과는 역설적으로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수많은 발걸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입자(粒子)가 되어 거대한 시스템 안으로 흡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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