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지 않은 지 두 달쯤 되었다. 인생을 통틀어 18년가량 일한 것 같은데, 마지막 정규직은 작년 9월까지였다. 이후로는 파트타이머를 하거나 한 달 정도씩의 단기계약을 이어가며 5개월 정도 재택근무를 했다. 4월에도 보수가 꽤 괜찮은 재택 일이 들어왔었는데, 이틀 하고 나서 포기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정신노동이 너무 고되다는 점과 하루 할당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처음 그런 일을 했으면 이를 악물고 버텼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루 13시간 이상 꼬박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내는 건 2월 한 달로 족했던 것 같다. 그땐 밤에 자는 동안 심장이 멈출까봐 진심으로 두려웠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죽겠구나 싶었다.
어쨌든 지금은 백수다. 모아놓은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많지가 않고, 그 돈을 써야 할 비상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통장 몇 개는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남편이 돈을 벌긴 하지만 1인분만 번다. 그것도 넉넉한 1인분이 아니라 빡빡한 1인분. 아이도 없는데 좀 쉬면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엄마도 아니고 주부도 아닌 채로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누군지 말해야 할 때 할 말이 없다. 나는 그걸 정말로 부끄러워한다. 나는 어딘가에 (경제적 보상이 돌아오는) 기여를 하지 않고 그냥 존재만 할 뿐인 상태를 못 견뎌하는 사람이다. 못 견디겠다고 생각하면서, 못 견디겠는 상태로 두 달을 살았다.
뭘 했는지도 모르게 봄이 다 지나갔다. 어디 적당해 보이는 곳에 지원도 하고 면접도 보고, 면접에 합격했지만 어쩐지 그 일이 싫어져서 안 하겠다고 하고, 요즘 중년 백수들이 많이 도전한다는 AI 관련 자격증인지 뭔지를 따려고 교육비도 덜컥 결제해보고, 드라마도 보고 음악도 듣고, 새로 좋아하게 된 아이돌 가수도 생겼고.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어져서 원고지 90매가 넘는 단편소설도 썼고, 찾아보니 어느 작은 출판사에서 소설을 모집한다길래 거기다 응모도 했다. 그게 4월과 5월에 내가 했던 일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막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그러는 동안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이 1원도 없다는 것. 문제는 그거지.
눈을 뜨면 나는 1시간 정도 생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비생산적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데도 신이 나를 죽이지 않고 또 하루를 주셨다는 게 신기해서 '이렇게 또? 진짜로 이렇게 또?' 생각하는 게 거의 1시간이다. 1시간이 지나면 그제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성경을 조금 읽는다. 남편이 낮 12시쯤 출근을 하기 때문에 11시 반쯤 되면 남편이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을 싼다. (밑반찬은 시어머니께서 다 해주시니까 그걸 넣으면 되고, 거기다 동그랑땡이나 떡갈비 같은 걸 구워서 함께 넣어주면 끝이다.) 워낙 늦게 일어나므로 나에게 오전 시간이란 건 거의 없는 편이다. 12시,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한 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엔 잠깐 가슴이 아프다. 그때부터 밤 11시까지 쭉 혼자다.
오늘은 오후 5시 반쯤 나가서 여름 구두를 하나 샀다. 어제 파트타임 일을 하나 지원해놨는데 혹시 면접을 보러 가게 되면 구두가 필요할 것이라서. 쇼핑몰을 1층부터 돌았다. 그냥 티셔츠나 반바지, 모자나 반지 같은 물건들이 있었는데, 그걸 보는 일이 쓸쓸했다. 여름 휴가, 수영복, 네일아트, 세일, 이벤트...... 그런 단어들을 보는 것도 쓸쓸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건 많은 것들로부터 소외되는 일이다. 저렇게 예쁘게 반짝이는 것들 중 뭐 하나도 신나게 고를 수가 없구나. 저렇게 생동감 넘치는 단어들 중 뭐 하나도 기다려지는 것이 없구나. 쓸쓸하고 작고 오그라든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
그래도, 쓸쓸해하기만 하려고 간 건 아니니까 ABC마트에서 가격도 괜찮고 모양도 색깔도 괜찮은 구두를 골라 결제를 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잘 골랐다고 생각하고, 오늘은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그럼 언제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아도 '뭐 신고 가지?'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내일은, 아침에 눈을 뜨면 '이렇게 또? 오늘도?'라는 생각을 50분 정도로 줄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