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면접을 보러 갔었다. 월수금 5시간짜리 파트타임이고 거의 최저시급에 가까운 금액을 제시해놓은 곳이었는데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챗GPT 이야기까지 나올 줄 몰랐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는 지쳐서 잠들었다. 그게 어제 일이었다니, 한 달쯤도 더 된 이야기 같다. 오늘 오후에 전화가 왔고, 공고에 올려놓은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제안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못 하겠다고 전했다.
요즘은 자꾸 마음을 취소한다. 하겠다는 마음, 해보겠다는 의욕, 괜찮다는 용기. 그런 것들을 습관처럼 취소하면서 산다.
이제껏 해온 일의 흐름과 맞는 걸 찾고 있지만, 해온 일의 끔찍했던 부분을 되풀이할 것이 뻔한 업무를 (이런 표현 참 싫지만) '이 나이에', 새로이, 새로 만난 사람과 맞춰가면서 할 생각을 하면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면 또 비슷한 일에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고 나면 역시 아니구나 싶어진다.
<성적표의 김민영>을 봤다. 스무 살 친구들 사이의 감정 같은 건, 그게 뭔지 잘 알고 기억도 하지만 특별히 와닿진 않았다. 대신 난 내가 보고 싶은 걸 봤다. '김민영'으로 지은 삼행시의 마지막 구절 같은 것.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김민영이 처음엔 사람들한테 잘 다가가지만 점점 말이 없어지는 캐릭터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훅 들어오는 것 같다가 뚝 멈춰버리는 사람이라니. 매력 있잖아.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도 있었고 심지어 그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이름 붙인 주제에 성적표에만 목숨 거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좋았다. 꿈을 떠벌리지 못하는 사람. 포기하고 숨겨버린 사람.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자기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살아가는 사람. 매력 있다.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혼자가 되어 숲속에서 약초를 캐며 사는 사람이 굼뜨고 현실에 무딘 친구 '정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것. 자기만의 속도를 알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정희는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하지만 김민영은 아닐 거다. 김민영은 계속 맴돌 거다. 취직을 해도 늘 이직을 준비할 거고, 애인이 생겨도 늘 애인을 외롭게 할 거다.
요 며칠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 인생에 뭐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있으리라는 법은 없겠구나.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온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그런 기대가 얼마나 큰 교만인지. 맡겨놓은 것처럼 굴 수는 없지. 충분히 아무것도 없을 수 있고, 그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그래도 한편으로 반대의 생각도 드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그 생각은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야, 너 곧 일 시작해. 한 달 뒤에는 마음 맞는 사람이랑 아주 신나게 일하고 있어. 네가 늘 하고 싶었던 일이야. 앞으로는 괴로운 일 안 해도 돼. 그리고 너 소설도 당선됐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 곧이다, 곧.
남편이 퇴근하고 버스를 탔을 시간이다. 하루가 영원 같다. 지난 18년을 나도 똑같이 그토록 긴 시간을 회사에 갖다 바쳤었고 난 그게 참 싫었는데, 지금은 소속된 곳 없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참 별로다. 어떻게 살든 김민영 삼행시의 마지막 구절을 품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