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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12. 2020

기억의 상자 (5)

기억 에세이 - 2007년 7월  


하늘거리는 치마를 선택했던 나는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것 같아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은 채 정장 스타일의 치마를 꾸역꾸역 꿰어 입었다. 무자비하게 불어대며 치마를 뒤집어놓는 질서 없는 바람. 부산에 살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나는 꽤 긴장했다. 면접관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여러 질문을 한국말로도, 영어로도 건넸고 다른 한 명은 별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이력서를 내려다보다가 했다. 썩 잘하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번역과 영문 이메일 작성 테스트를 마친 뒤에도 내가 과연 말이 되게 쓰고 나온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떨어질 거라 생각했고, 엄마를 다시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모든 일에 짜증이 북받쳐 많은 말을 쏟아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전화가 왔다. 부산국제영화제입니다. 급여와 담당업무도 말씀드릴 겸 한 번 더 와주셨으면 하는데요. 4개월 간의 단기스탭이었지만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 전 좋은 경험과 경력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영화제가 처음 열린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에서는 지역뉴스 때문에 흥미진진하던 메인 뉴스가 갑자기 끊기고, 좋아하는 가수가 출연하는 음악방송이 지루한 지역 다큐멘터리 때문에 전파를 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해운대에 부촌이 형성되고 '바다를 끼고 있는 강남'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까지, 현지인에게 부산은 거리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제1의 도시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사실상 시골이나 다름없는 동네였다. 제2의 장소에 사는 사람에게 제1의 장소는 세련된 억양의 말을 쓰는 똑똑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들이 제1의 문화를 누리는 곳,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지방방송'이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부산 사람들에게 90년대 중반 어마어마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출발한 영화제는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국내에서 잘 나가는 연예인 한 번 볼 일이 없던 부산에 제레미 아이언스가 홀연히 나타나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드는 모습은 너무나 생경하여 꿈만 같았다. 부산 시민 중 한 명일 뿐인 나까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해 영화제는 12회째를 앞두고 있었다. 사무실은 영화촬영스튜디오에 있었다. 동백역에서 내려 10분쯤 걸었던가. 공기에선 바다 냄새가 느껴졌고, 여름 하늘의 구름과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넬의 목소리는 꽤 잘 어울렸다. 출근시간인 9시 30분이 되기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에 언제나 조금쯤은 늦은 기분이었다. 


사무실에 부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근 직원들은 물론이고 나처럼 단기스탭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서울에서 이 일을 하기 위해 짐을 싸들고 부산까지 내려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나와 똑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은 영화제에서 일해본 경험이 몇 번 있다고 했고, 그래서 팀장, 실장과도 이미 아는 사이였다. 조금 무뚝뚝한 듯했지만 함께 지내기에 나쁘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점심을 먹으면서 친해졌다. 다들 영어를 잘했고, 몇몇 사람들은 진심으로 영화를 좋아했다. 일을 마치면 옆에 있는 시네마테크에 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같은 걸 보기도 했다. 월급이 적었기 때문인지 차츰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일이 많진 않았지만 상근 직원들은 밤낮없이 일하는 분위기였고, 집으로 퇴근하는 나와는 달리 숙소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정시퇴근을 할 이유가 딱히 없어 늦게까지 사무실에 머무르곤 했다. 


세계 각국의 영화사에서 이메일이 도착했고 나는 거기에 답장을 했다. 해결된 메일에 체크를 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메일은 다른 색깔로 표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수많은 영화사의 이름과 그 회사에 소속된 직원들의 이름까지도 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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