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에세이 - 2003년 7월
스물네 살, 결국 나도 남들처럼 어학연수를 떠났다. 휴학 경험 때문에 이미 나이가 많은 4학년이었으니 좀 늦은 편이었다. 사람들은 캐나다가 안전한 나라라고 말했다. 방학 기간인 두 달 동안만 경험 삼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이력서에 써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는 아직 회복 중이었다. 퇴원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을 테지만, 아직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를 '두고' 떠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언니의 회복에 도움을 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두고' 떠나는 기분이었다. 공항에는 엄마와 아저씨, 그리고 동생이 배웅을 나왔다. 게이트 앞에서 나를 보던 엄마와 아저씨의 얼굴은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어쩐 일인지 동생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장면만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동생이 나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 좀 이상했다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울지 않던 아이가 침대 위에서 엉엉 울었다는 것을 나는 얼마 후 언니의 이메일을 통해 알았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새천년을 맞이한 대학생들은 누구나 어학연수를 떠나고 있었다. 김해공항으로 들어서던 나는, 멋진 제복을 입고 군더더기 입는 몸짓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들처럼 항공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는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유학원에서는 비행기를 타기까지의 모든 절차를 상세히 알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프린트한 종이를 갖고 있었다. 캐나다행 비행기에 무사히 오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두려워한 것은 캐나다에서의 낯선 생활이 아니라 두 달이 지나 귀국한 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중 나는 가방에 넣어간 CD를 들었다. '타투'라고 하는 러시아 소녀 그룹의 음반이었다. 우울하고 멋진 노래들이었다. 좋아하는 몇 곡을 듣고 나면 다른 CD를 꺼냈다. 주로 당시 유행하던 힙합이었다. 그리고 에이브릴 라빈. 그해에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에이브릴 라빈에 열광했다. 눈화장을 짙게 한 그 어리고 예쁜 락커는 캐나다인이었다.
비행기는 밴쿠버 공항에 내렸다. 입국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처럼 어학연수를 온 몇몇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영어를 쓰러 그곳에 간 것이었지만 우선 사투리부터 버렸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짐을 옮길 때 어디선가 나타난 현지인이 도와주겠다며 접근했다. 나는 도움을 받은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이 돈을 지불해야 하는 도움이었음을 알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 나를 픽업하러 나온 현지 유학원 직원을 찾으면서는 조금 전의 일이 억울하다는 생각도 곧 잊었다. 우리는 내가 두 달간 홈스테이를 하게 될 집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캐나다인 남편을 두었다는 필리핀인 아주머니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새로운 유학생을 맞이하는 일이 아주머니에게는 지겹도록 반복되던 일상이었음을, 옷을 챙겨 입고 나오지도 그리 반가워하지도 않는 모습을 통해 나는 알 수 있었다.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자 방문이 열리더니 손에 수건과 비누를 든 내 또래 한국 여자아이가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 아이도 얼마 전에 도착해 내리 잠만 자던 참이라고 했다. 얼굴이 예쁜 아이였다.